‘MB 모델’로 非明 반격 진압? 이재명의 ‘우클릭’ 속내는
‘기본사회→성장’ 화두 전환…‘실용주의’로 중도 표심 노려 ‘지지율 하락세’에 반전 노리고 ‘사법 리스크’ 사전 방어 차원
“몰아서 일하는 게 왜 안 되냐고 하니 할 말 없더라.” (2월3일)
“K방산을 적극 지원하고 육성하겠다.” (2월4일)
“국제 통상 문제 해결, 경제인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 (2월5일)
대권을 향해 직진하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갑작스레 핸들을 오른쪽으로 튼 모양새다. 이 대표는 ‘실용주의’를 전면에 내걸고 보수의 화두였던 ‘경제와 안보’의 중요성을 연일 강조하기 시작했다. 성장보다는 분배, 경영자보다는 노동자를 대변해온 그간의 민주당과는 사뭇 다른 메시지를 발신하는 모습이다.
빠르게 ‘우클릭’하는 이 대표의 속내를 두고 정치권에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된다. 대권 캐스팅보터인 중도층을 잡기 위한 의도적 포석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다만 야권 일각에선 탄핵 정국에서 ‘사법 리스크’ 영향 등으로 이 대표와 당 지지율이 동시 정체되자, 이 대표가 ‘무리한 선회’를 시도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흑묘백묘론’ 내세우고 MB처럼 ‘경제 우선’ 강조
‘경제는 민주당’. 2월5일 서울 국회 본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회의실 벽면에 이 같은 백드롭(뒷걸개)이 걸렸다. 이날 이재명 대표는 삼성전자와 SK, LG, 현대자동차 등 4대 그룹 관계자를 초청해 ‘트럼프 2.0 시대’를 주제로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 대표는 이들을 향해 “저희는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신속하게 만들어 내는 게 목표”라며 “최대한 경청하고 메모해 정책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야당 대표가 재계 인사를 만나는 게 이례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권은 ‘메시지’와 ‘시점’을 주목한다. 이 대표가 ‘탄핵 정국’과 맞물려 경제 문제, 그중에서도 진보의 화두였던 ‘복지와 분배’가 아닌 ‘성장’의 중요성을 집중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대표의 이 같은 행보가 ‘경제 대통령’을 전면에 내걸고 대권을 쥐었던 MB(이명박 전 대통령)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가도 나온다. 실제 이 대표가 최근 내놓는 메시지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보다는 ‘낙수효과’를 강조했던 MB 정부의 정책 기조에 더 가깝다. 이 대표는 1월23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도 “기업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인 시대”라며 “일자리는 기업이 만들고, 기업의 성장 발전이 곧 국가 경제의 발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에서 ‘민간 주도 정부 지원’의 시대로 전환해야 한다”며 “기업활동 장애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대표는 과거 중국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의 실용주의적 개혁·개방 정책을 거론하며 언급한 ‘흑묘백묘론’을 꺼내들었다. 그는 “이제 ‘회복과 성장’이 이 시대의 가장 다급하고 중대한 과제”라며 “이념과 진영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 아니냐”고 말했다.
동시에 이 대표는 자신의 간판 정책이었던 이른바 ‘기본사회 시리즈’는 슬그머니 내려놓는 모습이다. 이 대표는 4·10 총선을 앞두고 “누구나 탈락하지 않는 적극적 복지로 나아가야 한다”며 기본사회 5대 공약을 제안한 바 있다. 그랬던 이 대표가 ‘기본사회위원장’에서 물러날 의사를 밝혔다. 관련해 1월31일 김성회 민주당 대변인은 “이 대표가 기본사회위원장에서 사퇴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며 “비상계엄 이후로 망가진 경제를 살리고 회복하는 문제를 우선순위로 규정하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중도·非尹 잡는다” 범보수로 영토 확장 꾀해
이 대표가 방향타를 급히 고쳐 잡으면서 민주당 안팎에서는 파열음도 터져 나오고 있다. 당장 민주당의 전통적 우군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등 양대 노총이 반발하는 모습이다. 이 대표가 반도체 업계를 주 52시간제의 예외로 두는 ‘반도체특별법’에 긍정적 반응을 내놓자, 양대 노총은 2월3일 국회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 대표를 작심 비판했다. 이들은 이 대표를 향해 “오로지 정권 창출에만 혈안이 되어 친기업, 반노동 정책을 추진한다면 노동자들 눈에는 윤석열 정권과 매한가지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양대 노총이 짚었듯, 이 대표의 ‘우클릭’ 목적은 ‘정권 창출’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우클릭’ 없이는 정권 탈환이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이 대표의 변심을 낳은 게 아니냐는 해석이 제기된다. 실제 최근 발표되는 여론조사에서는 공통적으로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의 상승세, 야당 지지율의 하락 또는 보합세가 나타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직후 ‘이재명 대세론’이 형성됐던 것과는 배치되는 민심이 감지되고 있는 셈이다.
이에 이 대표가 ‘역풍’ 우려에도 조기 대선을 의식해 빠르게 ‘산토끼’ 잡기에 나선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구체적으로 △분배보다는 성장에 민감하고 △12·3 비상계엄을 비판하며 △‘부정선거론’ 등에 동의하지 않는 ‘중도·비윤(非윤석열)계 범보수층’을 대상으로 이 대표가 영토 확장에 나선 게 아니냐는 해석이다.
실제 이 대표의 시도가 유효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최근 강성보수 성향 유권자가 빠르게 결집하고 있으나, 중도층에서 국민의힘에 대한 비호감도는 지속적으로 높게 조사되고 있어서다. 한국갤럽이 매주 발표하는 정당 지지율 조사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 통과 직후인 지난해 12월 셋째 주 국민의힘(13%)과 민주당(46%)의 중도층 응답자 지지율 격차는 3배 이상 벌어졌다. 최근 발표된 1월 4주 차 조사에서도 중도층 정당 지지율은 국민의힘 24%, 민주당 44%로 여전히 적지 않은 격차를 보였다.(전국 만 18세 이상 전화면접조사,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p, 중앙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우클릭 효과? 아직은 물음표…정체성 논란도
일각에선 이 대표가 자신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 이를 고리로 ‘선수 교체’를 노리는 비명계를 의식해 지지율 하락세를 급히 방어하려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대표는 지난해 11월 공직선거법 위반 재판 1심에서 의원직 상실형인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이 진행 중인 가운데, 비명계를 중심으로 ‘이재명 일극체제’가 위험하다는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친명계의 세가 비명계를 압도하고 있으나, 이 대표 지지율이 급락할 경우 비명계의 세가 불어날 가능성이 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이 대표는 대선 본선이 아닌 당장 공직선거법 항소심 결과를 의식해 여론 잡기에 나선 것”이라며 “만약 항소심에서 유죄가 나와 이 대표 지지율이 하락하면 대권후보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비명계는 기회를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대표로서는 (항소심 결과가 나오기 전) 조금이라도 더 지지율을 올려놓고 싶을 것이고, 그러니 ‘우클릭’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달라진 이재명’이 ‘이재명 대세론’에 다시금 불을 붙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당장 이 대표의 갑작스러운 우클릭을 두고 민주당 내부에서도 ‘당황스럽다’는 반응이 나온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한 민주당 의원은 “실용은 중요하나 당의 정체성까지 흔들려선 안 된다”고 말했다. 친문계 적자로 불리는 김경수 전 경남지사는 1월29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내란세력을 압도하지 못하는 제반 여론조사 지표는 우리에게 큰 숙제를 주고 있다”며 “국민의 마음을 읽고 우리 스스로부터 책임과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중도를 향한 정책을 펼치다 보면 기존 집토끼 지지층이 반발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집토끼를 위해 기존 정책을 고수하면 중도 확장력은 없어지게 된다”며 “이 대표의 시도들이 지지율을 정말로 끌어올릴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