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 여왕 김연경의 화려한 ‘라스트 댄스’가 시작됐다
흥국생명 김연경, 프로배구 최초 은퇴 투어 결정 은퇴 후 예능 출연·방송 해설위원·행정가·지도자 등 다양한 방향 거론
매일이 작별이다. 이제 진짜 ‘라스트 댄스’다. 한국 배구 역사에 큰 획을 그었기에 매 순간이 소중하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벌써부터 ‘이후’를 걱정한다. 그만큼 ‘김연경’이라는 이름 석 자가 한국 여자배구에서 차지하는 파괴력이 크다.
김연경(흥국생명)이 은퇴를 선언했다. 김연경은 2월13일 GS칼텍스와의 홈경기에서 승리한 뒤 “올 시즌 종료 후 은퇴할 예정”이라고 깜짝 발표했다. 1988년생인 김연경의 은퇴는 어느 정도 예고된 일이었다. 김연경은 “오랫동안 배구를 해왔고, 많이 고민했었다”면서 “관절도 아프고, 아직 정상급 기량을 갖췄을 때 은퇴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국내 안주하지 않고 해외 도전…‘월드 클래스’ 우뚝
김연경은 배구 선수였던 언니를 따라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공을 잡았다. 중학생 시절에는 키가 크지 않아서 주로 세터나 리베로로 출전했는데, 고교 진학 이후 3년 동안 키가 20cm 이상 자라면서 레프트 공격수로 자리 잡았다. 2005년에는 17세에 성인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기도 했다. ‘초고교급 선수’라는 평가 아래 그는 2005~06 시즌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었다.
직전 시즌 꼴찌였던 흥국생명은 김연경의 입단과 함께 승승장구하면서 그해 통합우승을 했다. 김연경은 프로 데뷔 첫해 득점상·공격상·서브상 등을 휩쓸면서 신인왕과 정규리그 MVP, 챔피언결정전 MVP를 쓸어담았다. 그야말로 ‘괴물 공격수’의 탄생이었다. 김연경을 앞세워 흥국생명은 이후 3시즌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통합우승 2번)했다. 다만 이런 과정에서 무릎 연골이 거듭 파열되며 3차례 수술대에 오르기도 했다.
국내 최정상에 오른 김연경은 안주하지 않고 해외 도전에 나섰다. 2008~09 시즌 이후 임대 형식으로 일본 여자배구팀 JT 마블러스와 2년 계약을 했다. 조혜정 이후 두 번째이자 프로배구 출범(2005년) 이후 처음으로 국외 리그로 진출한 여자선수가 됐다. 김연경은 경기당 평균 24.9점을 올리면서 전년도 9위 팀(전체 10개 팀)이었던 JT 마블러스를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2년 후에는 유럽 리그에 진출했다. 2012년 자유계약(FA) 신분을 놓고 흥국생명과 갈등을 빚었으나 자유의 몸이 되면서 튀르키예 페네르바체에서 7년간 뛰었다. 이후 중국 리그 상하이 광밍 유베이 등에서 활약하면서 ‘월드 클래스’ 선수로 인정받았다.
김연경이 국내 리그로 돌아온 것은 2020년이었다. 튀르키예 엑자시바시 비트라에서 뛰다가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계약을 해지하고 흥국생명으로 복귀했다. 당시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국내 선수들과 손발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연봉을 깎는 통 큰 결정을 했다. 튀르키예에서 받은 연봉의 3분의 1도 안 되는 수준(3억5000만원)의 계약이었다.
11년 만의 국내 리그 복귀였으나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어우흥’(어차피 우승은 흥국생명)이라는 말까지 나왔지만 시즌 중반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자매의 과거 학교폭력 의혹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흥국생명은 좌초했다. 김연경은 이후 중국 리그에서 잠깐 활약하다가 2022~23 시즌을 앞두고 다시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었다.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염원했지만 흥국생명은 준우승만 거듭했다. 우승을 달성한 뒤 박수 칠 때 떠나고 싶던 김연경의 바람도 계속 미뤄졌다.
2024~25 시즌 흥국생명은 2월20일 현재 24승5패(승점 70)로 정규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 2위권인 현대건설·정관장과는 승점 차이가 커서 1위로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할 가능성이 크다. 김연경은 공격 성공률 2위(45.61%), 득점 6위(535점) 등에 오르며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 중이다. 국내 선수 중 공격력은 으뜸이다. 공격 성공률만 놓고 보면, 2023~24 시즌(44.98%·2위)보다도 오히려 좋다. 기량이 떨어져서 은퇴를 결심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김연경은 앞서 정규리그 MVP를 6차례 차지했는데 올해도 MVP가 유력하다.
남자배구 인기 추월하는 여자배구 중흥시대 이끌어
김연경은 큰 키(192cm)에서 나오는 강력한 스파이크와 함께 타점 조절이 뛰어난 공격수다. 어린 시절 리베로 경험 덕분인지 리시브와 디그 능력도 수준급이다. 클러치 상황에서의 집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여기에 경기 흐름을 읽는 능력까지 갖췄다. 리더십 또한 강하다.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후배 선수들을 뭉치게 하면서 2020 도쿄올림픽(2021년 개최) 4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국제대회 성적을 기반 삼아 여자배구는 남자배구의 인기를 추월했다. 평균 연봉도 1억6100만원으로 다른 국외 리그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게 됐다. 김연경 한 명이 일궈낸 업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가히 김연경이 바꿔놓은 배구 지형이라고 평할 수는 있다.
국내외 리그, 국가대표팀에서 화려한 업적을 남긴 김연경은 프로배구 최초로 은퇴 투어도 나선다. 프로야구에서도 국민타자로 불린 이승엽·이대호밖에 하지 못했던 은퇴 투어다. 한국 배구에서의 김연경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화성 IBK기업은행전(2월16일), 수원 현대건설전(2월21일)에 이어 3월1일 대전 정관장전(충무체육관), 3월11일 광주 페퍼저축은행전(페퍼스타디움), 3월20일 서울 GS칼텍스전(장충체육관)이 끝난 뒤 김연경을 위한 자체 은퇴식이 열리게 된다. 상대팀은 해당 체육관에서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를 치른 김연경을 위해 은퇴 행사를 열고 선물 등을 전달하게 된다. 김연경은 앞서 흥국생명 구단 유튜브 채널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경기가 남지 않았지만, 많은 분이 배구장에 오셔서 내 마지막 경기들을 봐주셨으면 좋겠다. 웃으면서 응원해 달라”고 밝힌 바 있다.
김연경의 등번호 10번도 영구 결번된다. 김연경은 수원 한일전산여고 시절부터 등번호 10번을 달았으며 흥국생명은 물론이고 일본·튀르키예·중국 리그 등에서도 10번을 놓치지 않아 팀내 비중을 입증했다. 국가대표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V리그에서 영구 결번은 OK저축은행 로버트 랜디 시몬, IBK기업은행 김사니에 이어 3번째다.
김연경의 공식 은퇴식은 5월 개최될 예정인 ‘KYK 인비테이셔널 2025’ 이벤트 경기에서 열린다. KYK 인비테이셔널 2025는 김연경이 국외 선수들을 국내로 초청해 치르는 올스타 대회다. 은퇴 뒤 김연경의 ‘제2의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스타성을 감안하면, 구독자 117만 명의 자체 유튜브(식빵언니 김연경)를 계속 운영하면서 TV 예능에 출연하고, 방송 해설위원으로 나설 수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도전했던 것처럼 스포츠 행정가로 변신할 수도 있다. 지난해에는 배구 지도자로 뛰고 싶은 마음도 내비쳤었다. 모든 미래는 열려 있다. ‘한국 배구 개척자’ 김연경이기에 어떤 미래든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