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불복’인가 ‘비장의 승부수’인가…尹 ‘개헌 카드’에 여야는 딜레마
복귀 전제로 임기 단축·책임총리제 제시…국민 통합·사과 메시지는 없어 尹, 조기 대선에서 ‘영향력’ 행사 가능성…탄핵 찬성파 韓-安-吳 고민 커져 이재명 향한 ‘개헌 압박’ 더 커진다…잠룡 중 李만 개헌 논의에 ‘부정적’
“제가 직무에 복귀하게 된다면 먼저 ‘87체제’를 우리 몸에 맞추고 미래세대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한 개헌과 정치 개혁의 추진에 임기 후반부를 집중하겠습니다.”
시한부 대통령의 ‘헛된 희망’일까, 율사 대통령의 ‘근거 있는 자신감’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2월25일 자신의 탄핵심판 최후진술에서 복귀를 전제하고 대통령 임기 단축을 포함한 ‘개헌’을 공약했다. 윤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에 대한 반성과 사과 대신 국정 운전대를 다시 쥐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여야는 각각 다른 딜레마에, 정국은 카오스(혼돈) 상태에 직면했다. 탄핵심판 과정에서 여권 내 ‘윤심’이 진화되기는커녕 더 크게 발화하자, 여권 내 ‘탄핵 찬성파’ 대권 잠룡들도 대선 행보 첫걸음을 쉽사리 떼지 못하는 모양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윤 대통령의 탄핵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물밑에선 ‘개헌 딜레마’의 기류도 감지된다. 이재명 대표가 ‘내란 진압이 먼저’라는 명분을 앞세워 개헌 논의를 외면하고 있으나 김동연 경기지사, 김경수 전 경남지사, 김부겸 전 국무총리 등 야권 잠룡들에 더해 ‘개헌 필요성’에 동의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다. ‘정치 개혁’을 교두보 삼아 ‘탄핵의 강’을 건너겠다는 윤 대통령과 이를 불안과 불만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여야 지도부 사이, ‘개헌 블랙홀’이 탄핵 정국 이후에도 정계를 뒤흔들 핵심 변수로 부상한 모습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현직 대통령이 직접 자신의 탄핵심판 최후진술에 나선 전례는 없었다. 앞서 탄핵소추됐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 모두 대리인단이 최후진술을 대독했다. 그리고 두 대통령 모두 최후진술에서 ‘탄핵 사유의 부당함’과 ‘헌법정신 준수 의지’를 강조했다.
‘승복 선언’ 대신 ‘개헌 카드’ 꺼내든 尹
2004년 4월30일, 탄핵심판 최후진술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광범 변호사를 통해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하면서 국회에서 요구한 사항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정치적 논란이나 오해에 불과하다”며 “정치적 압박과 외부의 다양한 요구 속에서도 헌법의 정신을 지키려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2017년 2월27일, 박 전 대통령 탄핵심판 최후진술에서 이동흡 변호사는 박 전 대통령의 진술서를 통해 “단 한 번도 사익을 위해 또는 특정 개인의 이익 추구를 도와주기 위해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남용하거나 행사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내외 어려움이 산적한 상황에서 저의 불찰로 국민들께 큰 상처를 드리고 국정 운영에 부담을 드린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달랐다. 그는 현직 대통령 최초로 탄핵심판정에 직접 섰다. 윤 대통령은 최후진술에서 약 68분간에 걸친 ‘마라톤 변론’을 펼쳤다. 관심을 모은 것은 메시지였다. 최후진술 이틀 전(2월23일) 정치권에서는 ‘윤 대통령이 임기 단축 개헌 제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지라시(정보지), 이를 뒷받침하는 언론보도가 확산했다. 다만 당시 윤 대통령 대리인단의 윤갑근 변호사는 “누군가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의 방안을 이야기한 것”이라며 “탄핵을 면하기 위해 조건부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은 대통령의 방식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전망은 적중했다. 대리인단은 ‘대통령의 방식’이 아니라고 했으나, 윤 대통령은 최후진술에서 ‘개헌 카드’를 전격 꺼내들었다. 그는 11차 변론에서 최후진술을 통해 “국민의 뜻을 모아 조속히 개헌을 추진해 우리 사회 변화에 잘 맞는 헌법과 정치구조를 탄생시키는 데 신명을 다하겠다”며 “국민 통합은 헌법과 헌법 가치를 통해 이루어지는 만큼 개헌과 정치 개혁이 올바르게 추진되면 그 과정에서 갈라지고 분열된 국민들이 통합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이어 “그렇게 되면 현행 헌법상 잔여 임기에 연연해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제게는 크나큰 영광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취임 뒤 공식 석상에서 개헌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복귀 후 내·외치에 대한 구상까지 밝혔다. 윤 대통령은 “국정 업무에 대해서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글로벌 복합위기 상황을 감안해 대통령은 대외관계에 치중하고 국내 문제는 총리에게 권한을 대폭 넘길 생각”이라며 “글로벌 중추 외교 기조로 역대 가장 강력한 한미동맹을 구축하고 한·미·일 협력을 이끌어냈던 경험으로 대외관계에서 국익을 지키는 일에 매진하겠다”고 강조했다. 헌재가 탄핵소추를 기각해 직무에 복귀하면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구축된 현행 헌법 체제를 직접 손보겠다는 취지다.
‘잔여 임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대목은 자신의 임기를 단축해서라도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간 정치권에서 거론됐던 ‘대통령 4년 중임제’를 염두에 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 최근 윤 대통령을 면회한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2월26일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윤 대통령 최후진술에 대해 “개헌만 완료하면 중도 퇴진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힌 것”이라며 “윤 대통령은 탄핵 기각, 직무 복귀를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호응하는 與…“민심 아닌 윤심 따라 개헌” 비판도
여당은 ‘개헌 손익계산기’를 분주히 두들기고 있다. 우선 친윤(親윤석열)계 지도부는 윤 대통령이 ‘득점’에 성공했다고 판단하는 모습이다. 윤 대통령이 ‘계엄의 불가피성-탄핵의 불합리성-개헌의 필요성’을 충분히 설득했다는 얘기다. 나아가 여당은 조기 대선에 ‘올인’하고 있는 민주당을 향해 개헌 논의 테이블에 들어오라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2월27일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 회의에서 “비상계엄의 정당성에 대한 평가는 헌법재판소와 법원에 맡겨놓더라도 이러한 사태를 부른 우리 정치의 현실을 국민과 함께 돌아볼 필요가 있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임기까지 내던지며 스스로 희생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만큼 이번 기회에 권력구조(개편)를 포함한 개헌을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은 이날 회의에서 개헌특위 발족을 의결했다. 특위 위원장은 주호영 국회부의장이 맡고, 신성범·조은희·최형두·유상범 의원 등이 위원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당 자체 개헌안 마련에 착수할 계획이다.
다만 윤 대통령이 ‘돌아올 결심’을 밝히면서, 그와의 ‘헤어질 결심’을 준비하던 여당 잠룡들의 속내는 복잡해졌다. 우선 윤 대통령이 ‘임기 단축’ 가능성을 시사했기에, 조기 대선을 바라는 대권주자들과의 ‘교집합’은 생겨난 셈이다. 또 계엄으로 일부 분산됐던 보수 지지층을 개헌을 고리로 다시 규합할 수 있다는 점도 여당 주자들로서는 호재로 인식될 수 있다.
이에 계파를 막론하고 여권 대선주자급 인사들은 개헌에 긍정적 반응을 내놨다. “탄핵이 기각돼 조속한 개헌과 정치 개혁으로 ‘87체제’ 청산과 함께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홍준표 대구시장), “1987년 헌법 체제를 극복하는 핵심은 지방 분권”(오세훈 서울시장), “국민은 제왕적 대통령 권한 축소·입법권력 축소 개헌을 강력 요구하고 있다”(안철수 의원) 등이다. 윤 대통령 탄핵에 찬성했던 한동훈 국민의힘 전 대표도 최근 발간한 책에서 “계엄 사태를 겪으면서 현행 헌법상 대통령제를 바꿀 때가 됐다고 실감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개헌을 띄운 주체가 여당이 아닌 ‘피고인 윤석열’이란 점이다. 특히 개헌의 전제가 ‘탄핵 기각’이란 점이 대중의 반감을 살 수 있다는 우려가 여권 일각에서 나온다. 가뜩이나 ‘정권 교체’에 찬성하고 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는 여론이 과반을 훌쩍 넘기고 있는 가운데, 탄핵 기로 앞에서 ‘윤석열표 개헌’을 띄우면 개헌의 진정성이 희석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는 2월25일 시사저널TV에 출연해 “윤 대통령이 복귀를 전제로 정치적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은 현시점에선 최악”이라며 “개헌 문제는 (비상계엄으로 탄핵소추된) 윤 대통령이 얘기할 사안이 아니다. 다음에 등장할 대선주자들 사이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여권 대선주자 측 일각에서는 ‘질서 있는 퇴진’을 거부했던 윤 대통령이 이제 와 ‘임기 단축 개헌’ 등을 얘기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윤 대통령이 ‘헌재 결정에 대한 승복’ 의사 대신 ‘탄핵 기각 후 계획’을 밝히면서 사회 혼란이 더 가중될 우려가 커졌고, 나아가 여당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도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비윤(非윤석열)계 대권후보 측 관계자는 “개헌 필요성에는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정말 그렇게 개헌이 필요했다면 왜 임기 초에, 비상계엄 전후에 개헌을 말하지 않았나”라고 반문한 뒤 “개헌은 ‘민심’이 주도해서 이뤄야 하는 것인데 ‘윤심’이 주도한다는 인상을 주면 곤란하다. 이 상태로 조기 대선이 치러져 여당이 개헌을 공약하면 대중에게는 ‘윤석열식 개헌’이란 이미지를 줄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탄핵부터’ 외치는 이재명…비명계는 ‘개헌 압박’
윤 대통령이 계엄이란 도박에 이어 개헌에 베팅하자 정치권의 시선은 이재명 대표로 향하기 시작했다. 결국 개헌의 키는 대통령도, 여당도 아닌 거야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헌법을 고치려면 국회에서 재적 의원의 3분의 2(200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개헌 논의가 진전되려면 과반 의석의 민주당을 이끄는 이 대표의 의지가 중요한 셈이다. 이 대표는 2022년 대선 당시 대통령 4년 중임제를 주장하며 ‘분권형 대통령제’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최근엔 개헌 논의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대표는 2월19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 ‘최근 정치 개혁 주요 화두인 개헌에 대한 의지가 있느냐’는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의 질문에 “지금 개헌을 논하면 빨간 넥타이 매신 분들(여당)이 좋아하게 돼 있다”며 “탄핵 문제와 헌정 질서 회복, 헌정 파괴 책임 추궁 문제가 뒷전으로 밀릴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원론적으로라도 개헌에 대한 로드맵이 있느냐’는 장 소장의 질문에는 “현 국면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기에 일단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고 본다”며 “민주당과 이재명이 (개헌론에) 어떤 입장인지는 이미 다 정리돼 발표돼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야권 대선주자들은 이 대표를 향해 ‘개헌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거듭 압박하는 모습이다. ‘정치 개혁’은 윤 대통령 탄핵과 구분되는 시대정신으로, 조기 대선 여부와 관계없이 하루빨리 논의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2월24일 JTBC 《오대영 라이브》에 출연해 “3년 전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하고 연대를 하면서 이미 함께 서명도 하고 약속도 했었다”며 “임기 단축 개헌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김부겸 전 총리는 2월24일 저녁 이 대표와의 만찬 회동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이 대표에게 개헌) 문제에 대해 ‘이 정도로 이야기를 안 하면 어떡하느냐’고 했더니, 이 대표가 ‘나도 생각은 있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지 않냐. (윤 대통령) 탄핵에 집중해야 될 때가 아니냐’라고 해서 조금 공방이 오갔다”고 밝혔다. 2월27일 여의도 한 식당에서 이 대표와 만난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도 “헌법 개정 등 연합 정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의견 수렴 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이 대표는 “현재로서는 내란 사태에 집중해야 하지만, 해당 제안에 대해 고민해 보겠다”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尹 탄핵’과 ‘개헌’은 별개? 민심 흐름 보니
윤 대통령과 여당이 개헌을 밀어붙이고, 비명계 주자들이 이 대표에게 개헌을 압박하는 배경에는 ‘민심의 흐름’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12·3 비상계엄’ 후 윤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를 바라는 민심이 과반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이에 못지않게 ‘개헌 필요성’에 공감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다. 즉, 개헌은 여당엔 여론을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로, 야당엔 무시하면 ‘되치기’를 당할 수 있는 위기로 인식되고 있는 셈이다.
비상계엄 선포 당일인 작년 12월3일부터 사흘간 한국갤럽이 실시한 ‘현행 대통령제 개헌’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필요하다’는 응답은 51%, ‘필요치 않다’는 응답은 38%로 조사됐다.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후 작년 12월22~23일 한국일보·한국리서치 조사에서도 개헌 찬성 응답이 53%였고, 이어 실시된 KBS·한국리서치 조사(12월29~31일)에서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61%였다. 올해 들어서도 민심의 흐름은 유사하다. 조선일보가 케이스탯리서치에 의뢰해 1월21~22일 실시한 조사에선 55%가 개헌이 필요하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