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말하지 않는 다수’의 말은 누가 듣는가
“배운 것이 많으니까 궁리하는 것이 맨날 못된 짓거리야. 옳은 소리를 하면 들어야지. 소도 그만큼 가르치면 진작에 알아들어.” “공부 많이 한 것들이 도둑놈 되더라, 맘 공부, 사람 공부를 해야 한다”. 최근에 한 잡지가 어느 시골 마을에서 만난 어르신들의 얘기를 모아 게재한 내용 가운데 일부다. 원래는 지방 사투리가 섞인 것을 편의상 표준어로 다시 풀어서 썼다. 그 글들 중에는 “대통령은 국민이 제일로 커야 하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제일 커”와 같이 비상계엄 사태를 꼬집은 말들도 포함돼 있다.
이 구술이 특별하게 눈에 띈 까닭은 그 속에서 어떤 현란한 멋 부림도 없이 순정하고 깊은 지혜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늘 들리는 ‘다듬어진 말’과는 확실하게 결이 다르다. 메시지 자체의 힘만으로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진짜 어른의 말이다. 갈아 만들고 모양 낸 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이른바 말깨나 하는 사람들 중에 이처럼 순박하게 정곡을 꿰뚫는 어른의 말을 하는 이는 지금 얼마나 될까.
대통령 탄핵심판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함께 높아지는 광장의 목소리에서는 이렇듯 나직하게 심금을 울리는 말들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쇳소리 나는 거친 언사, 상대를 무찔러서 이기고야 말겠다는 투쟁의 언어만 가득하다. 계엄과 탄핵의 옳고 그름은 이미 그들의 평가 기준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느 도지사가 말한 것처럼 “대통령 탄핵심판이 계엄 행위에 대한 판단의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 수호 세력과 반국가 세력의 충돌로 상징화되고 있는 마당”이 펼쳐져 있는 셈이다. 마치 ‘도장 깨기’라도 하듯 버스까지 동원해 전국의 주요 도시와 대학들을 돌며 탄핵 찬반 집회가 세 대결 양상으로 펼쳐지는 것도 이런 충돌의 극단화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대립의 형태가, 무엇이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자칭) 애국 세력’과 ‘(타칭) 반국가 세력’ 간에 누가 이기고 지느냐를 가리는 잔혹 게임으로 바뀌면 ‘상식’(윤 대통령이 ‘공정’과 함께 그토록 강조했던)이 파고들 자리는 사라진다, 사실관계의 정합성이나 논리적 타당성을 배제한 채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가 흔들리는 것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전시 등 비상사태가 아니었음에도 자의적인 결정에 따라 군 병력을 앞세워 계엄령을 발동한 대통령의 행위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판단은 이미 여러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내려졌다. 그런데도 그에게 면죄부를 주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넘어간다면 그 후과가 어떠할지는 불을 보듯 환하다. 무엇보다, 위험한 전례를 남김으로써 앞으로 어떤 대통령이나 국정 운영이 힘들어지면 언제든 제멋대로 계엄을 넘볼 수 있게 되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다수의 주류 언론이 보수·진보의 틀을 뛰어넘어 비슷한 논조로 계엄의 문제점, 부당성을 지적하는 것도 그런 상식적 판단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광장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 구성원의 의중을 다 드러내는 것은 아니고, 전체의 인식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삶이 바빠서, 혹은 상식을 따르면 될 일을 두고 굳이 큰 목소리로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광장에 나가지 않은 ‘말하지 않는 다수’의 생각이 그래서 중요하다. 상식은 말하지 않아도 교감될 수 있는, 인류의 오래된 지혜의 총합이자 유산이 아니던가. 평소에는 오지랖 넓게 나서서 말하지 않으면서도 기회가 주어지면 가슴에 담은 속 깊은 말들을 진중하고 나직이 전해주는 저 시골 마을 어르신들처럼 속 깊은 다수의 내면에 지금은 더 많이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