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중도보수론’, ‘원칙 없는 실용’ 비판 속 이슈 주도권 장악 [박동원의 시시비비]

李, 상속세 개편·연금 개혁 등 여당 의제 잠식하며 정국 이끌어  “GPS 있어야 항해 가능” 지적에도 ‘중도층 민심’은 긍정적

2025-03-08     박동원 폴리컴 대표

기초자치단체장이었던 이재명 대표를 대선후보 반열에 올려놓은 2가지 개념이 있다. 바로 강한 이를 누르고 약한 이를 돕는 게 정치라는 ‘억강부약(抑强扶弱)’,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대동세상(大同世上)’이다. 억강부약의 ‘공정’, 대동세상의 ‘평등’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대중 소구력을 가진 개념이다. 모든 정치적 선동은 이 두 서사 안에 있다. 이 대표의 트레이드마크인 ‘기본시리즈’는 이 두 서사의 결정판이다. 이 대표는 공정과 평등을 외치며 권력을 얻어왔고, 그의 강력한 팬덤 ‘손가락혁명군’과 ‘개딸’도 이에 열광하는 이들이다. 

공정과 평등은 진보가 내세우는 가치다. 이 대표는 진보적 가치를 상징자본으로 지금까지 정치를 해왔다. 재벌 해체와 토지 보유세를 주장하며 강한 진보 포지션을 견지하던 성남시장 시절 이 대표는 페이스북에 “중도 프레임에 속지 말라. 이재명은 중도 코스프레 안 한다. 중도 이동한다며 정체성 잃고 애매모호하게 왔다 갔다 하면 오히려 의심받는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중도조차 허용 않던 그가 느닷없이 ‘중도보수론’을 들고나왔다. 단순히 선거용 중도실용 정책이 아닌 당의 이념적 포지션을 옮기는 과격한 이슈 파이팅은 큰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23일 국회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정권 심판 여론 50% 넘어

이 대표의 잦은 입장 바꾸기는 특유의 정치적 수사법일 수 있지만, 조금 들여다보면 더불어민주당의 모호한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다. 사회학자 출신 박형준 부산시장은 최근 자신이 쓴 소책자 《대한민국 재건을 위한 명령》에서 “민주화 이후 민주당은 한 번도 자신의 이념을 세우기 위한 치열한 논의와 논쟁을 거친 적이 없다. 최근 나온 ‘먹사니즘’ ‘실용주의’ ‘중도보수 자처’ 등은 모두 ‘이념 결핍’을 가리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며 “분명한 자기 이념 없이 권력 잡기를 위한 경쟁에만 매몰되어 왔다”고 했다. 

실제 국민의힘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이라는 보수적 이념 방향성을 견지하며 증세나 혁신 논쟁 등 내부 투쟁을 벌인 데 반해, 민주당은 계파싸움만 하며 진보인지 보수인지 이념적 정체성이 모호한 게 사실이다. 이 대표는 지난 총선에선 “왜 중국에 집적거리나 ‘셰셰(謝謝·감사하다)’ 하면 되지”라고 했다가 이번엔 한미동맹 강화를 들고나왔다. 이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이를 실용외교를 강조한 것이라고 답했다. 실용주의는 기회주의가 아니다. 중도실용은 상황에 따른 변신이 아니라 이념적 원칙을 견지하면서 현실적 해결 방도를 찾는 방법론이다. 원칙 없는 실용은 방향성을 잃어 국가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GPS가 있어야 항해가 가능하다.

어쨌든 지난해 12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 이후 정체되어 있던 민주당과 이 대표의 지지율이 2월 들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갤럽 전체 차기 지도자 선호도에서 이 대표는 1월 4주 31%→2월 4주 35%로 상승한 반면, 김문수 장관의 선호도는 11%→10%로 정체되어 있다. 리얼미터 정당 지지율도 1월 4주와 2월 4주 각각 민주당 41.7%→44.7%, 국민의힘 45.4%→37.6%로 민주당은 상승 추세인 반면 국민의힘은 하락 추세다. 2월 4주 양자대결에서도 이 대표는 처음으로 50%를 돌파했다. 한국갤럽 1월 4주와 2월 4주 중도 성향의 이 대표 지지율도 30%→39%로 상승했다. 

최근 여론 변화는 첫째, 이 대표가 제기한 중도보수론 자체의 타당성을 떠나 민주당이 정국 이슈 주도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둘째, 중도 외연 확장으로 ‘진보 대 보수’ 대립 구도를 무너트리고 있기 때문이다. ‘흑묘백묘론’까지 언급하며 상속세 개편 등 세금 인하 정책, 반도체특별법, 연금 개혁 등 적극적으로 여당 이슈를 가져와 대립 전선을 형해화하고 있다. 특히 상속세 개편 등을 통해 지난 대선 패배의 결정적 요인이었던 한강벨트 라인을 공략하는 미세 전략도 펼치고 있다. 중도보수론 이슈는 사실성 여부를 떠나 강한 논란을 일으키며 주목도를 높였다는 측면에서 성공한 이슈라고 볼 수 있다. 

민주당이 진보냐 중도보수냐 따지는 건 사실 평론의 영역일 뿐이다. 선거에서 이슈 파이팅은 논리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유권자는 단순하다. 중도가 강한 쪽으로 이끌리는 건 사실 여부보다 설득력과 인과성을 가진 그럴듯한 말이 강하게 어필할 때다. 이 대표가 거침없이 중도보수론 이슈를 제기할 수 있는 이유는 첫째, 지난 총선 ‘비명횡사’ 공천으로 당을 일극체제로 만들어놓아 뭐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둘째, 계엄 이후 탄핵 정국에서 국민의힘 포지션이 오른쪽으로 옮겨가며 중원이 비어있어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동명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이 2월21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사무실에서 열린 간담회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외연 확대 없는 與…아직까진 속수무책

마지막으로 대선 승리의 유리한 상황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정권 심판 여론이 50%를 넘는 형국에서 큰 실수를 하지 않고 중도층만 일정 정도 포획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여당은 대선 준비는커녕 마치 대선을 포기한 듯한 행위들을 하고 있다. 광장의 강성 보수 목소리는 지지층 결집까진 가능했지만 더 이상 확장력이 없다. 한국갤럽 2월 4주 중도층 정권 교체 여론이 62%인 상황에서 광장의 목소리가 중도층에 닿을 리 만무하다. 더구나 국민의힘이 잠식했다고 여겼던 2030세대의 탄핵 찬성 여론이 각각 71%, 62%다.

고정 지지층 공고화는 선거의 기본이다. 하지만 중도 외연 확장 없이 지지층만으로 이기기 힘들다. 이런 때일수록 유연한 양면 전략을 펼쳐야 한다. 대선 전략을 총괄하는 조정훈 국민의힘 전략기획부총장은 여러 방송에서 “조기 대선 언급도, 준비도 절대 없다”고 했다. 5선의 윤상현 의원은 정치활동을 재개한 한동훈 전 대표와 홍준표 시장을 향해서도 ‘그분들의 헛된 꿈’이라며 지금은 조기 대선의 시간이 아니라고 했다. 여당 지도부가 대통령을 옹호할 수는 있지만 조기 대선이 충분히 예측되는 상황에서 굳이 이런 발언을 할 필요가 있을까.

천년 제국 로마가 가능했던 건 관용성과 개방성 때문이다. 이는 기업과 정당 모두에 해당하며 선거는 더더욱 그렇다. 정당은 정권 창출을 목표로 하는 같은 이념을 공유한 집단이다. 이념은 구심력이, 집권은 원심력이 작용한다. 이념에만 집착하면 정권 창출이 안 되고, 집권에만 천착하면 이념이 흔들린다. 이념을 견지하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실용적으로 관용성과 개방성을 발휘할 수 있다. DJP(김대중·김종필)연합,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 박근혜의 경제민주화 수용, 윤석열의 호남 포섭 등에서 확인되었듯 얼마든지 유연한 전략을 펼칠 수 있다. 지도부의 창조적 유연함, 지지자의 전략적 인내가 없으면 선거는 해보나 마나다. 이재명의 ‘중도보수론’은 타당성 여부를 떠나 여유와 자신감에서 나온 유연함이고, 지지자들의 전략적 인내가 만들어낸 이슈 파이팅이다. 이 대표는 중원을 계속 점유하는데 여당은 아직까지 속수무책이다. 

박동원 폴리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