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내 연구회, 권력집단 되어선 안 돼…순수 모임으로 끝나야”

[인터뷰] ‘우리법연구회’ 창립 회원 심규철 변호사 “우리법 출신이 대법원장이라도 그를 비판할 수 있어야”

2025-03-07     이태준·김현지 기자

2025년 초 사회 1면을 장식하고 있는 뉴스는 단연 헌법재판소이고, 그와 함께 따라붙는 키워드는 ‘우리법연구회’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에 참여하는 헌법재판관 일부가 우리법연구회 출신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법원 내 사모임에 대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펼쳐졌다. 시사저널은 우리법연구회 창립 회원인 심규철 변호사를 3월5일 만났다.

사실상 해체된 지 10년도 더 지난 우리법연구회가 지금 또다시 정국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까닭은 무엇일까. 심 변호사로부터 우리법연구회의 발족 일화부터 법원 내 연구모임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한 이야기 등을 들었다. 심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2년 차이던 1988년 6월 법원 시보 시절 사법부 개혁을 요구하는 소장 판사·변호사들과 함께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고, 이것이 우리법연구회의 시초가 됐다. 그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16대 국회의원(충북 보은·옥천·영동)을 지낸 바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김명수 전 대법원장 체제 들어서면서 공격받아”

헌법재판소 재판관 중 상당수가 우리법연구회 혹은 그 후신이라고 알려진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다 보니, 보수진영으로부터 ‘사법부의 하나회’라는 거센 공격을 받고 있다.

“우리법연구회는 ‘사법부의 권력화’를 추구하는 모임이 아니었다. 법조인으로 살아가는 개개인으로서 올바른 법조인의 길을 걷자는 취지로 출발했다. 대학 시절부터 고시만 공부하는 법대생이 되기보다는 우리 사회를 위해 고민하는 자세를 갖자는 생각을 (동료들과 서로) 나눴다.”

모임 이름에 어떤 뜻이 있나. 

“창립 초기 회원들은 서울대 법대 출신이 주축이었다. 우리법연구회 이름 자체도 고차원적인 뜻이 있는 게 아니었다. 잡담만 하고 밥만 먹고 헤어지는 것보단 의미 있는 공부를 꾸준히 해나가자는 의견을 나눴다. (법을 대하는) 자세와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활동을 이어 나가자는 취지에서 스터디를 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법률 지식을 갖고 법률적 소양을 우리가 공부하자는 것이기에 ‘우리법연구회’로 이름을 지었다.”

모임 결성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달라.   

“발족 당시는 노동운동이 활발하던 때였다. 노동법에 대한 이론 정립이 안 되고 일본 판례를 공부하던 때였다. 노동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판례가 없는 것도 있었다. 집회, 시위가 규제받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언론출판의 자유 그리고 명예훼손 법리를 심도 있게 공부해 보자고 했다. 1990년대 중반 그리고 1995년도까지는 회원들이 제 사무실로 모였다. 이후 판사들끼리 따로 사무실을 외부에 마련했다. 그러면서 판사들의 모임으로 변했다. 서울대 법대 출신 인맥 그리고 친목 모임으로 유지되다가 사법연수원 기수별로 일 년에 3~4명씩 회원을 받아들였다. 변호사들은 별도로 충원이 안 돼서 판사들의 모임이 됐다. 사법부의 권력화에 대한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우리법연구회가 ‘좌파 이념 모임’이라거나 ‘권력추구형 사조직’으로 변질됐다고 공격하는 목소리도 있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 체제에 들어서면서 (그런 공격을 받아) 안타깝게 됐다. 또 문형배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우리(우리법연구회)도 사법부의 주류가 됐다’고 한 발언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초기 회원 중 박시환 전 대법관과 고(故) 한기택 판사가 있다. 대학 1년 후배인 한 판사는 2005년도에 운명했다. 어렵게 컸고, 바른 친구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말레이시아에 갔다가 해일이 와서 휩쓸려 그만 숨을 거뒀다. 한 판사만 살아있었어도 지금 우리법연구회가 이렇게 (공격받게) 되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박 전 대법관만큼이나 목숨을 걸면서 판결문을 썼다. 그러다 보니, 패소한 사람도 불복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면서 판결문을 쓴다는 것은 절차적 공정성이 전제됐다는 의미다.”

 

“국민이 사법부 신뢰하지 않는다는 보도 안타깝다”

우리법연구회의 순기능에도 10여 년 전 해체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우리법연구회와 지금은 많이 다르다. 일단 대법원장이 배출됐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당초 우리법연구회를 발족할 땐 없었다가 모임 발족 일 년 후 추천을 통해 들어왔다. 우리법연구회 정신이라면, 김 전 대법원장에 대해서도 우리법연구회 출신들이 비판할 수 있는 모임이 돼야 했다. 또 ‘우리가 주류가 됐다’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 이 발언은 우리법연구회가 타락했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몇 년간 국회에 있는 동안 우리법연구회에 대해 깊이 관여는 못 하고 친분 관계만 유지했다. 참여정부 때부터 우리법연구회 출신들이 권력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강금실 전 장관도 우리법연구회 창립 회원이다.”

법원 내 연구모임을 현시점에서는 어떻게 바라보나. 

“판사들의 학술 연구 자체에 대해 지적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규모가 커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20~30명가량 소수 친목 모임으로 끝나야 한다. 규모가 커져서 카르텔을 이루는 권력집단이 되어선 안 된다.”

한국 법원은 다른 나라에 비해 선진화됐다고 보는가. 

“수준이 많이 올라갔다. 제가 변호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일본 판례에 많이 의지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 판례를 공부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우리 대법원 판례가 축적됐기 때문이다. 다만, 시국과 관련된 형사사건에 있어 (대중으로부터) 지적받는 판결이 나올 때, 특히 우리법연구회가 거론될 때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우리법연구회를 창립할 때 박시환 전 대법관이 가졌던, 판결을 대하는 자세를 우리법연구회 출신들이 지금도 가져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우리법연구회의 후신이라고 알려진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들이 주목되기도 했는데. 

“우리법연구회 출신인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초대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을 맡았다. 그래서 (우리법연구회 회원들이 모두 국제인권법연구회로 갔다는) 그런 오해를 받는 것 같다. 과거 우리법연구회 창립 회원들은 2차 사법 파동으로 김용철 전 대법원장을 물러나게 했던 주역들이다. 이 정신으로 대법원장이 잘못할 때 제동을 걸 수 있는 건강한 역할을 해야 했다. 우리법연구회가 사법부의 또 하나의 권력기관으로 추진됐다면 잘못된 것이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 때 그런 모습이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논란이 앞으로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하다. 

“우리법연구회로 인해 사법부와 헌재의 신뢰가 오히려 떨어지는 듯해 안타깝다.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은 사법부를 떠나고, 변호사를 했으면 좋겠다. 국민이 사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보도가 연일 나온다. 우리법연구회가 신뢰를 증진하기는커녕 실추시키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깝다. 구성원 전체가 깊이 반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