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나는 분노한다. ‘under15’에

2025-03-29     최영미 시인·이미출판사 대표

얼마 전 수원 스타필드의 별마당도서관에서 ‘다른 목소리, 여성시인들’ 강연을 하며 탄실(彈實) 김명순(金明淳·1896~1951)의 시를 소개했다. 김명순이 1924년에 발표한 시 《유언》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永訣) 할 때/ 개천가에 고꾸라졌던지 들에 피 뽑았던지/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오/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다음에 나갓튼 사람이 나드래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그러면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얼마나 당했으면 서른 살도 안 된 여자가 이처럼 참혹한 유언을 써야 하나. 얼마나 당하고 살았으면 이십대 청춘의 입에서 이렇게 황량하고 슬픈 언어가 나오나. 조선에 태어난 게 죄이던가. 김명순은 우리나라 근대 여성 문인 최초로 작품집 《생명의 과실》(1925년)을 발간한 선구자였다.

일본 유학 중 고향 선배인 이응준에게 데이트 강간을 당한 후 남성 문인들로부터 조롱과 따돌림을 당했지만 소설 20여 편, 시 100여 편에 수필, 평론, 희곡을 쓰고 번역도 했다. 주위의 싸늘한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보려 애썼지만 1939년 김동인이 발표한 소설 《김연실전》의 실제 인물로 알려져 문단에서 완전히 유폐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땅콩과 치약을 팔며 연명하다 도쿄의 어느 뇌병원에서 숨졌다. 신여성(新女性) 1세대인 김명순과 나혜석(羅蕙錫), 김일엽(金一葉)의 닮은 듯 닮지 않은 예술과 생애를 누군가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

수원 별마당도서관의 아늑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왔다. 쇼핑 시설 안에 도서관이라니 얼마나 멋진 발상인가. 시 강연을 마치고 돌아와 뉴스를 검색하다 나는 분노했다. MBN에서 15세 이하 소녀들로 걸그룹 오디션 《언더피프틴 under15》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곧 방송한다고 한다. 미리 공개한 홍보 영상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어깨가 드러난 옷, 성인 여성처럼 꾸민 아이들. 아이들에게 미니스커트 입히고 진한 화장을 하게 해 누구의 시선을 사로잡으려는 건가? ‘15세 이하의 소녀’를 간판으로 내건 예능을 기획·제작한 피디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성범죄를 예방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지는 못할망정 성범죄를 조장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다니. 대한민국 방송계에 만연한 ‘성의 상품화’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나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페이스북 활동을 자제하고 조용히 지내려 했건만 이건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서 페이스북에 들어가 글을 올렸다. “여성과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이거 막아야 해요. 방송 중단하고 제작진은 공식 사과하세요.”

3월25일 서울 마포구 스탠포드호텔에서 열린 '언더피프틴' 긴급 보고회에서 서혜진 대표(왼쪽부터), 황인영 대표, 용석인 PD가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언더피프틴 under15》은 얼토당토않은 계엄령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고 중차대한 사건이다. 각계의 비난이 쏟아지자 제작진은 아이들의 노출을 최소화한 옷과 좀 더 점잖은(?) 홍보용 짧은 동영상을 새로 만들어 올렸다. 그렇다고 당신들의 검은 속이 가려질 것 같은가.

이 썩은 예능이 방영되든 중단되든 간에, 어린 소녀들을 앞세운 예능을 기획했다는 그 자체가 그동안 ‘K문화’의 기형적인 발전에 가려진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겠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해자를 만들지 않는 사회, 가해자를 양산하지 않는 나라가 돼야 한다. 성폭력에 관대하고 성범죄를 조장하는 방송가의 문화와 이를 용인하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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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