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대망론, ‘반기문 모델’일까 ‘노무현+정몽준 모델’일까 [최병천의 인사이트]
‘높은 지지율’과 ‘독자적 지지 기반’ 갖췄던 반기문과 정몽준 韓 대행 향한 러브콜은 그 자체로 국민의힘의 위기 드러내
대선 국면이 본격화됐다. 관심사는 두 가지다. 누가 승리할까? 어떻게 해야 승리할 수 있는가? 여러 지표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4월 3주 차 한국갤럽 조사에서 정당 지지율은 민주당 42%, 국민의힘 34%다. 격차는 8%포인트다. 같은 조사에서 ‘정권 교체’ 응답 비율은 52%, ‘정권 유지’는 37%였다. 격차는 무려 15%포인트다. 대선후보 지지율 격차는 더 확연하다. 이재명 38%, 홍준표 7%, 김문수 7%, 한동훈 6% 수준이다. 리얼미터 4월 3주 차 조사는 이재명-이준석-국민의힘 후보의 3자 가상대결을 실시했다. 이재명 후보는 54% 내외, 이준석 후보는 4~6% 내외, 김문수·한동훈·홍준표 후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에 머물렀다.
국민의힘 입장에서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대선 승리를 도모하기 어렵다. ‘한덕수 대망론’은 묘수(?)의 일환으로 나온 발상이다. 핵심은 ‘반명(反이재명) 빅텐트론’ 구상이다. 국민의힘에서 선출된 후보, 한덕수 권한대행, 이준석 후보, 민주당에서 탈당했던 전직 국회의원 일부까지 모두 연합해 승리를 도모하는 전략이다.
韓 대행 고리로 ‘反이재명 빅텐트’ 승부수
한덕수 대망론은 실현될 수 있을까? 한국 정치사의 제3후보론 모델과 비교해 보자. 비교를 통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2000년대 이후로 국한하면, 크게 3가지 모델이 있다. ①반기문 모델 ②노무현+정몽준 모델 ③문국현 모델이다.
반기문 모델은 2016~17년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흥미로운 포인트는 반기문 대선후보론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태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점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16년 12월31일 임기를 마칠 예정이었다. 그는 임기를 수행 중이던 2016년 5월25일 ‘관훈 포럼’에서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한다.
이 자리에서 당시 반 사무총장은 ‘임기가 끝나면 무엇을 하겠나’라는 질문에 “국민으로서의 역할을 더 생각해 보겠다”며 대선 출마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른 질문에서는 “국가 통합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겠다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누가 봐도 사실상의 출마 선언이었다. 다음 날 주요 일간지 1면은 ‘반기문 대선 출마 시사’로 도배된다. 2016년 6월9일 실시된 한국갤럽 대선후보 여론조사를 보면 반기문 26%, 문재인 16%, 안철수 10%였다. 반 총장은 문재인 민주당 대표를 10%포인트 정도 앞섰다.
반 총장의 지지율은 최순실 태블릿PC가 공개된 2016년 10월말을 분기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한다. 유엔 사무총장이 끝난 1월에 귀국하고, 본격 행보를 시작한다. 이 시점은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을 심사하던 중이었다. 이때 반총장은 ‘보수정당의 대타 후보’ 성격이 있었다. 귀국 이후 갖가지 구설에 시달리다 2월1일 불출마 선언을 한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모델은 2002년 대선 때 실현됐다.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이 에너지가 됐다. 월드컵 4강 진출 이후 당시 월드컵조직위원회 위원장을 했던 정몽준 의원의 인기가 치솟는다. 대선은 2002년 12월19일이었다. 한국갤럽 9월22일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회창 31.3%, 정몽준 30.8%, 노무현 16.8%였다. 2강 1중 구도다.
2002년 9월까지 ‘1중 후보’였던 노무현 후보는 결국 ‘2강에’ 속했던 이회창 후보를 꺾고 대선에서 승리한다.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역전승 사례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2002년 노무현+정몽준 모델을 2025년 대선에서 ‘보수의 버전’으로 재현할 수 있다면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덕수 지지율, 잠재력 있지만 파괴력은 아직
제3후보의 또 다른 사례는 문국현 모델이 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현재 민주당 계열(당시 열린우리당)은 패색이 짙었다.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는 정동영 의원이었다. 정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과 가까운 친노 계열과 불편한 관계였다. 국민의힘 계열(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는 서울시장을 했던 이명박 후보였다. 이명박 후보에겐 청계천 복원, 버스체계 개편 등 화려한 업적이 있었다.
2002년 대선은 12월19일이었다. 대선을 두 달 앞둔 10월17일 한겨레가 리서치플러스에 의뢰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명박 53.4%, 정동영 16.1%, 문국현 6.5%였다. 이명박 후보는 이미 과반을 기록했고, 정동영 후보는 3분의 1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고, 문국현 후보 역시 한 자릿수 지지율에 머물렀다. 당시 문 후보 출마는 ‘대선 패배 이후’까지를 내다본 포석을 꾀했다. 대선 패배 이후 정계 개편의 한 축이 되려 했다.
반기문 모델과 노무현+정몽준 모델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높은 지지율이다. 반기문은 20%대 중후반의 지지율로 문재인 대표를 10%포인트 이상 앞서기도 했다. 정몽준 역시 30%에 근접하는 지지율을 보였다. 둘째, 독자적인 지지 기반을 갖고 있었다.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화려한 스펙, 정몽준 역시 월드컵 4강 진출의 에너지가 뒷받침됐다. 반기문과 정몽준은 둘 다 진보·보수로 구분되지 않는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높은 지지율과 독자적인 지지 기반이라는 측면에서 한덕수 권한대행은 어떨까? 둘 다 해당하지 않는다. 여러 후보를 열거하는 방식에서 한덕수 권한대행이 10%를 넘어선 조사 결과는 거의 없다. 지지율이 높지 않은 것은 국민의힘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지지 기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수진영의 전략가들은 한덕수 대망론을 통해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모델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한덕수 대행이 반기문과 정몽준만큼의 지지율, 혹은 잠재력을 보여줄지 매우 불투명하다. 지지율은 문국현과 비슷하고, 결말은 반기문과 비슷할 가능성도 있다.
한덕수 플랜 외에도 국민의힘이 대선에서 격차를 줄이는 다른 방법이 있긴 한다. 계엄을 반대하고, 탄핵을 찬성한 사람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되는 경우다. 그나마 격차를 줄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