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 오일머니, 사우디의 놀이터 된 아시아 축구

아시아 최고 클럽 대항전 ACLE 8강전에서 광주FC ‘굴욕’ 사우디, 호날두·미트로비치 등 유럽 슈퍼스타들 거액에 영입

2025-05-03     서호정 축구칼럼니스트

아시아 축구의 패러다임이 다시 오일머니로 넘어가는 것일까. 아시아 최고의 클럽 대항전인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엘리트’(이하 ACLE)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현상이 큰 화제다. 16강전을 돌파한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각 4개 팀씩 8개 팀이 격돌하는 ACLE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압도적인 전력 차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충격의 스타트는 알힐랄이 끊었다. 4월26일 사우디 제다에서 열린 ACLE 8강전 첫 경기에서 광주FC를 무려 7대0으로 대파했다. 광주는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 전술가로 평가받는 이정효 감독이 조별리그에 이어 16강전에서도 동아시아의 강자인 일본의 비셀 고베를 꺾은 경쟁력 높은 팀이다. K리그 클럽 중 유일하게 8강에 오른 덕에 국민적 응원을 받았지만 알힐랄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하루 뒤인 4월27일에는 알나스르가 일본의 요코하마 F.마리노스를 4대1로, 알아흘리가 태국의 부리람 유나이티드를 3대0으로 각각 꺾었다. 알나스르와 알아흘리는 전반에만 3골을 넣은 뒤 후반에는 가볍게 페이스 조절을 하는 모습을 보이며 동아시아 축구에 굴욕을 선사했다. 일본의 가와사키 프론탈레가 4월28일 알사드와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3대2로 승리하며 가까스로 동아시아의 자존심을 챙겼다. 하지만 알사드는 카타르 클럽으로 최근 중동 축구 내 위상이나 기세가 과거만 못한 팀이다.

사우디 ‘초호화군단’ 알힐랄이 4월26일(한국시간) 사우디 제다에서 열린 2024~25 ACLE 8강전에서 광주FC를 7대0으로 대파하고 기뻐하고 있다. ⓒ한국프로 축구연맹 제공

알힐랄, 선수 가치 평가에서 광주FC의 20배 이상

사우디 리그 3개 팀은 8강전 3경기에서 총 14골을 넣고 1골만 허용하며 동아시아 축구에 폭격을 가했다. 득점자 면면도 화려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사디오 마네(이상 알나스르), 알렉산다르 미트로비치, 세르게이 밀린코비치-사비치(이상 알힐랄), 리야드 마레즈, 호베르투 피르미누(이상 알아흘리) 등은 최근까지 유럽 축구의 중심에서 활약하던 슈퍼스타들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분석도 간단명료하다. 돈의 힘은 솔직하다는 것. 이적시장 전문 사이트인 ‘트랜스퍼마크트’에 따르면 선수 가치 평가에서 알힐랄(2951억원)은 광주(139억원)의 20배가 넘었다. 사우디는 2022년 12월 호날두 영입을 신호탄으로 각 클럽들이 세계적인 선수들을 경쟁적으로 영입하고 있다. 현재는 브라질로 돌아갔지만, 네이마르는 라이벌 알나스르의 호날두 영입에 맞서 알힐랄이 1500억원의 이적료를 투자해 영입한 또 다른 월드스타였다. 당초 알힐랄은 리오넬 메시를 영입하려 했지만, 메시가 미국 무대로 향하자 네이마르로 대체했다. 이번 대회에 나서진 못했지만 사우디의 또 다른 명문클럽 알이티하드는 카림 벤제마, 은골로 캉테 등을 영입했다.

알힐랄, 알나스르, 알아흘리, 그리고 알이티하드가 막대한 자금력으로 유럽에서 최고의 기량을 증명한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는 확실한 뒷배가 있다. 사우디 국부펀드로 불리는 공공투자기금(이하 PIF)이 인수해 운영하는 구단이기 때문이다. 자국에서 인기가 높은 축구클럽 빅4가 모두 동일한 운영 주체의 지원을 받는 것이다. PIF는 2020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뉴캐슬 유나이티드 구단을 인수해 운영 중이다.

PIF가 지원하는 빅4 클럽의 운영자금 규모가 얼마인지 알려진 바가 없다. 사실상 무한대로 평가받는다. 만 40세의 호날두는 연봉만 2억 유로(약 3000억원)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알힐랄의 조르제 제수스 감독도 연봉이 200억원 수준으로 광주 선수단 총 연봉의 2배였다. 선수나 감독이 오겠다는 의사만 보이면 현재 유럽에서 받는 수준의 2~3배는 가볍게 제시하는 것이 사우디의 영입 정책이다.

2023년만 해도 사우디는 황혼기에 있는 스타들이 말년에 연금 수령하듯 큰 연봉을 받기 위해 향하는 무대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존 두란, 모하메드 시마칸(이상 알나스르), 레오나르두(알힐랄), 가브리 베이가(알아흘리) 등 유럽 빅클럽이 원한 20대 초중반 선수들까지 사우디로 향한다. 최근에는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미토마 가오루(브라이턴) 등 아시아 출신의 유명 선수까지 노리는 분위기다.

AFC의 제도 변화도 사우디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 불과 2년 전인 2023년만 해도 일본의 우라와 레즈가 알힐랄을 결승에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에는 외국인 선수 출전 제한 규정이 있어 보유한 선수를 다 활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AFC는 지난 대회부터 외국인 제한 규정을 폐지했다. 

홈 텃세도 사우디의 압승에 큰 영향을 줬다. 8강 토너먼트부터는 한곳에 모여 2주 사이 경기를 집중해 치르는 파이널 스테이지로 여는데, 이번 대회는 사우디 제2의 도시인 제다에서 열렸다. 광주가 알힐랄과 맞붙은 킹압둘라 스포츠시티에서는 알힐랄 팬들의 대규모 카드섹션이 벌어졌다. 중립 경기라고 볼 수 없는 분위기였다.

4월26일(현지시간) ACLE 8강전에서 일본의 요코하마를 상대로 경기하고 있는 사우디 알나스르의 호날두(오른쪽) ⓒREUTERS연합

사우디, 막강 자금력으로 AFC도 주물러

AFC는 현행 규정과 시스템을 당분간 유지할 분위기다. 파이널 스테이지를 사우디에서 중립 경기 형태로 치르는 것은 2~3년가량 계속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J리그는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일찌감치 외국인 보유 제한을 폐지했지만, 제도적 변화로 넘을 수 없는 돈의 힘만 실감했다. 한국 K리그도 이번 참패 후 외국인 제도를 중심으로 한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있지만, 혁신적으로 투자가 확대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제도 변화의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국과 일본은 프로스포츠 투자에서 국가 주도 체제가 끝난 지 오래다. 국가 차원에서 조 단위의 돈을 투하하는 사우디의 방식과 경쟁할 수 있는 시대는 다시 오기 어렵다. AFC도 사우디에 유리한 판을 깔아주고 있다. 현재 AFC의 최대 스폰서는 사우디의 ‘네옴’이다. 4조 달러를 투자해 건설 중인 신도시로 세계적 화제가 된 네옴시티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회사다. 2021년 스폰서십을 맺었고 지난해 2029년까지로 연장했다. 사우디 관광청도 세 번째로 많은 금액을 후원 중이다. AFC는 2년 전 상금을 기존의 3배로 늘린 ACLE를 새로 출범했는데 최대 후원이 사우디에서 나오고 있다.

사우디는 국가적 차원에서 축구를 비롯한 인기 스포츠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미스터 에브리싱’이라는 별명이 있는 실권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석유 수출에 의존하던 산업구조를 다각화하기 위한 ‘비전2030’을 새 정책으로 삼았다. 그 안에는 스포츠와 대중문화, 게임과 전기차 등 새로운 국가 동력을 세우기 위한 산업의 비중이 높다.

세계 스포츠계에서의 영향력도 막강하다. 2022년에는 20억 달러를 투자해 LIV 골프리그를 출범해 PGA가 주도하던 기존 골프 산업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UFC와 F1 포뮬러 등 팬층이 두터운 스포츠도 사우디에서 개최됐다. 2027년 아시안컵, 2029년 동계아시안게임, 2034년 월드컵과 하계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스포츠 이벤트를 잇달아 유치했고, 2036년 하계올림픽 유치전에도 뛰어든 상태다. 사우디 정부는 월드컵 경기장을 첨단 신도시인 네옴시티에 건설해 홍보에 적극 활용, 폐쇄적인 국가 이미지를 청산할 계획이다.

이 모든 현상이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 그리고 그가 이끄는 PIF의 자금력과 연결돼 있다. 결국 아시아 축구를 뒤흔드는 사우디 클럽들의 위력은 향후 전 세계 스포츠에서 벌어질 사우디발 오일머니의 힘을 1차적으로 알린 폭풍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