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vs 동맹’ 대결 시대는 끝났다…고조된 북핵 위협 감안 새 외교 노선 필요 [최병천의 인사이트]
‘햇볕정책’ 설계자 이종석-‘한미 동맹’ 방점 위성락…李 정부 실용외교의 양 날개 中의 ‘대만 병합’ 가능성 냉정히 마주해야…어떤 선택지가 ‘국익’에 더 부합할지 고민할 시점
이재명 대통령은 국정원장 후보자로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을 지명하고, 대통령실 안보실장으로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를 임명했다. 언론은 이종석 국정원장 후보자를 ‘자주파’로, 위성락 안보실장을 ‘동맹파’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자주파와 동맹파의 갈등 재현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이 ‘국익 중심 실용외교’를 위해 자주파와 동맹파를 모두 포용했다고 평가했다. 자주파와 동맹파의 구분법에는 큰 이견이 없었던 셈이다.
6월9일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에 출연해 ‘6인회 모임’을 소개하는 발언을 했다. 임동원, 정세현, 문정인, 이종석, 서훈, 박지원이 6인회 멤버이며, 한두 달에 한 번씩 오찬을 하면서 3~4시간씩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라고 소개했다. 이들 대다수가 자주파라고 덧붙였다.
자주파와 동맹파의 갈등은 노무현 정부 때 일이다. 2003년 2월부터 2008년 2월까지였다. 첫째, 2003년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입장 차이다. 미국은 한국에 이라크 파병을 요청했다. 방법과 규모가 쟁점이었다. 동맹파는 상당한 규모의 전투병 파병을, 이종석 당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을 중심으로 하는 자주파는 비전투병 위주의 소규모 파병을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비전투병 위주로 구성된 자이툰 부대를 보냈다.
박지원 “이종석은 자주파 6인회 멤버”
둘째, 주한미군의 용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하는 방법론이 달랐다. 외교부 북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맹파는 신속 이전을 원했고, 국회 비준 없이 행정부 결정만으로 추진할 수 있는 SOFA(주한미군지위협정) 문서 형식을 원했다. 반면, 자주파는 환경 문제를 명분으로 국회 비준을 거치는 협정 방식을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국회 비준 방식이 채택됐다. 국회 비준안은 2004년 12월9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셋째, ‘자주파 투서’ 사건이 터졌다. 자주파와 동맹파 사이에 몇 차례 갈등이 발생했는데, 당시 북미국 3과장이던 조현동 현 주미대사는 외교부 직원들과의 술자리에서 “영어도 못하고 미국도 안 가본 인사들이 무슨 대미 외교를 하느냐” “내년 4월 총선 이후 이 정권은 망한다”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이는 외교부 직원의 투서로 알려지게 된다. 이 사건으로 조현동 당시 과장은 보직 해임됐고, 북미국장과 외교부 장관이 물러나게 됐다. 당시 물러난 북미국장이 위성락 안보실장이고, 외교부 장관은 윤영관 현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이다. 이종석 후보자는 당시 자주파가 주축인 청와대 NSC의 사무처장이었다.
넷째,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동북아 균형자론을 둘러싼 이슈다. 외교부를 중심으로 하는 동맹파 입지는 약해졌고, 자주외교 노선이 강화됐다. 2005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연설에서 “우리의 선택에 따라 동북아 세력 판도가 변화할 것”이라며 ‘중견국가로서 균형자 역할’을 선언했다. ‘동북아 균형자론’으로 불리는 입장인데, 이에 대해 미국의 보수층에서는 한국이 동맹에서 이탈하려는 게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2005년 말에는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문건 유출 파동’이 겹치면서 자주파 내부에서도 균열이 발생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왜 이렇게 자주파와 동맹파 간 갈등이 많았을까?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당은 네 번을 집권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 이재명 정부다. 이 중에서 노무현 정부는 ‘86세대의 첫 집권’으로 볼 수 있다. 1980년 광주의 비극 이후 학생운동은 전두환 군부정권이 미국의 협조 속에서 집권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됐다. 그렇게 판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의 군사작전지휘권을 미국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 과정에서 미국 문화원 및 대사관을 점거하면서 ‘광주 학살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물었던’ 이유였다.
미국 역시 12·12 쿠데타와 1980년 광주 학살로 인해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반미 여론’이 확산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렇기에 1987년 6월 항쟁 때는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두환 군부정권의 ‘계엄령 발동’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작년 12·3 계엄 당시 미국 국무부는 일관되게 윤석열 정부에 비판적이고, 촛불시위대에 우호적인 입장을 냈다. 1980년 ‘광주의 비극’과 1980년대 학생운동의 ‘미국 책임론’을 미국 정부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의 외교라인은 한미 동맹만으로도 만족하는 ‘냉전 세대’의 선배들과 달리 ‘미국에도 할 말을 하는’ 정서를 갖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 시기에 유독 자주파와 동맹파의 갈등이 많았던 이유다.
자주파와 동맹파의 대립 구도는 현재도 유효할까? 아닐 가능성이 더 많다.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적 환경과 주요 이슈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초기는 ‘북한의 핵실험’ 이전이었다. 남북 화해와 교류가 확대되던 시기였다. 2006년 10월 북한의 첫 핵실험이 있었다. 이때를 분기점으로 한국 외교에서는 ‘북핵 문제 해결’이 최우선 순위가 됐다.
신냉전 시대…한·미·일 군사 협력 강화해야
지금의 상황은 또 달라졌다. 북한은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됐다. 중국은 경제력 신장 덕에 군사력도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있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쇠퇴하며 한국에 더 많은 안보 비용 분담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친서방 국가지만, 동시에 중국과 러시아를 적대시하면 안 되는 처지에 있다.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단층선으로는 ‘대만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2025년 현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국 외교의 주요 쟁점은 ‘동맹파’와 ‘균형외교파’(균형파)의 대립 구도로 보는 게 타당하다. 예컨대, 새로운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첫째, 중국이 대만을 병합해도 한국의 국익과 무관한 것인가? 둘째, 중국의 대만 병합이 시도될 경우 한국은 연루되지 않을 수 있나? 셋째, 한미 동맹을 고려할 때 한국은 미국의 요구에 어느 정도 관여하는 게 타당한가? 넷째, ‘세력 균형’ 관점에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게 국익에 부합한다면, 한·미·일 군사협력 혹은 한일 협력은 더 강화하는 게 옳지 않나? 다섯째, 중국의 부상이라는 흐름 속에서 한국의 대북 정책 기조는 무엇이어야 하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는 크게 ①냉전 형성기 ②냉전기 ③탈냉전기로 구분되고, 각각 분단과 한국전쟁, 박정희 정부의 안보 위기와 중화학공업, 노태우의 북방외교와 김대중 정부의 6자회담과 연결됐다. 한국 외교는 다시 ‘신냉전기’를 마주하고 있다. 새로운 국제정치 환경은 새로운 외교 노선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