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론] 야구도 인생도 속도보다 방향
임찬규 예찬, 혹은 호텔 예찬에 대한 글을 쓸까? 내가 좋아하는 LG 트윈스의 임찬규 선수 얼굴을 처음 본 게 서울의 어느 호텔 앞이었으니 야구와 호텔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주제는 아니다. 작년 가을에 대만에서 열린 프리미어12 경기를 앞두고 야구 국가대표 선수들을 고척돔 근처의 어느 호텔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
오늘 아침은 고척돔 근처가 아니라 우리 집 근처의 A호텔에서 조식 뷔페를 맛있게 먹었다. 원고 마감을 앞두고, 글 전쟁을 앞두고 호텔 뷔페를 배 터지게 먹는 게 요 몇 년 습관이 되었다. 무슨 대단한 글을 쓰는 건 아니나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내가 글쟁이임을 상기시켜주는 소중한 지면이니 최선을 다해 쓰고 싶다. 시사저널의 시론 마감을 앞두고 훈제연어와 달걀과 크루아상으로 에너지를 충전한 뒤에 귀가해 책상 앞을 서성였다. 노트북 전원이 한 번에 켜지지 않아, 손가락 끝으로 전원을 여러 차례 누르다 포기하고 볼펜을 쥐어들고 사생결단을 내듯이 온 힘을 다해 전원을 눌렀는데도 화면이 켜지지 않는다. 얘가 열을 받아 그런가? 키보드를 만져보니 뜨겁다. 6월인데도 벌써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수납장에서 손바닥만 한 선풍기를 꺼내 선풍기 바람으로 노트북의 열기를 식히니 금방 화면이 켜진다. 아아! 감격한 나는 오늘 내가 발견한 이 비결을 나처럼 노트북이 켜지지 않아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다. 10년도 더 된 노트북인데 가끔 전원이 켜지지 않아 내 속을 썩인다. 내가 노트북을 여는 날은 보통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계산서를 발행하거나 강의 파일을 정리하거나 시사저널에 보내는 원고를 쓸 때만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야구에 대한 글은 이미 여러 차례 썼는데 사람들이 나를 야구 전문가로 인정해주지 않으니 증거를 대보련다. 2024년 11월 시사저널에 보낸 ‘시론’에서 이미 나는 김서현 선수가 2025년에 대활약할 것을 예언했었다.
“…‘김서현은 한국 야구의 미래야’라고 함께 경기를 보던 A에게 말했다. 성인 대표팀에 처음 합류한 김서현(한화 이글스)의 표정에서 긴장보다 여유가 느껴졌다. 소속팀에서 김서현 선수에게 더 많은 출장 기회를 준다면 그는 더욱 발전해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가 될 수 있다.”(‘변방으로 밀려난 한국 야구’)
프리미어12에서 4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자신감을 얻은 김서현은 요즘 한국 야구를 폭격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투수들에게 가장 큰 보약은 자신감이다. LG 트윈스 팬으로서 한화가 너무 잘나가는 것을 경계하는 나는 김서현이 LG와 경기할 때는 공을 좀 살살 던졌으면 좋겠다. 야구가 시작되는 저녁이 오기 전에 원고를 끝내야지. 여름에 소개할 좋은 시 없을까? 류인 선생이 번역한 《元曲 300首》(원곡 300수)를 뒤적이다 내 눈에 걸린 시.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최고요/ 글을 모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니/ 사리에 어두워야 사람들이 현명하다고 칭송하네/ 하느님이 맑음과 혼탁함을 개의치 않으시니/ 좋음과 나쁨에 각자의 길이 없네/ 착한 사람은 업신여김을 받고/ 청빈한 사람은 웃음거리가 되며/ 공부한 사람은 모두 지쳐서 쓰러지는구나”(무명씨, 「중려 조천자(中吕 朝天子)」 제3수)
문인들의 벼슬길이 막혔던 원나라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이가 지은 노래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풍속은 어찌 이리 비슷한지. ‘야구도 인생도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낭만투수 임찬규의 명언이 문득 떠오르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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