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위기의 본질, YS 이후 ‘우경화’하며 20년간 ‘변화 거부’ [박동원의 시시비비]
‘중도 확장’ 없이 70대만 바라보는 野…‘중도보수’로 영토 확장하는 與 주류 ‘기득권’ 내려놓고, 비주류 ‘분노’ 삭이며 치료와 치유 병행해야
김민석 국무총리 인사청문회도, 정부의 추가경정예산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상황에서 ‘안철수 혁신위’ 분란은 가뜩이나 참담한 지지율의 국민의힘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 국민의힘은 버티면 이재명 정권이 실패해 다시 민심이 돌아올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상대 실패에 반사이익을 얻는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존이 현실이긴 하지만 오판하면 안 된다. 현 상황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지난 20여 년간 축적된 결과고, 이 상황은 또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가장 든든한 지지 기반인 4050세대에 무상복지 확대, 상속세와 종합부동산세 완화 등으로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고, 반일 민족주의와 검찰 개혁 등으로 공정과 정의라는 지지 명분을 부여해 왔다는 것이 중론이다. 지난 총선의 여야 간 전체 지역구 득표율은 5.4%포인트(p) 차지만 의석수는 1.8배 차가 났다. 특히 서울은 득표율이 5.94%p 차지만, 의석수는 3.4배 차다. 이는 수도권 4050의 압도적 민주당 지지 때문이다. 그 결과 보수 계열은 2016년 20대 총선 때 122석 이후 103석, 108석에 그치며 소수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런 상황은 20년 전부터 시작됐다. 지역주의 정서가 상대적으로 낮아지며 ‘세대 변수’가 상수로 등장했다. 유권자 비율이 가장 높은 4050은 2002년 압도적 노무현 지지부터 20년간 흔들림 없이 민주당을 지지했다. 20년 전 20대였던 현 40대는 출구조사 기준 2002년 노무현 62%, 2012년 문재인 69.1%, 2022년 이재명 64.4%, 2025년 이재명 72.7%, 30대는 같은 선거에서 노무현 60.2%, 문재인 53.3%, 이재명 51.2%, 이재명 69.8%를 지지했다. 정치적 동질성이 강한 4050의 투표 행태는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소장파도 공천했는데…사라진 선당후사 정신
국민의힘이 계엄 이후 ‘아스팔트 세력’과 동조할 때 민주당은 대선과 집권 이후에도 적극적인 중도 공략과 보수층까지 허물고 있다. 민주당은 ‘정치검찰 조작기소 대응 TF(태스크포스)’를 만들어 대북송금 의혹 사건, 대장동 사건 등 광범위한 지지 여론을 등에 업고 검찰 개혁을 명분으로 이재명 대통령 관련 재판들을 뒤집을 태세다. 천신만고 끝에 정권을 잡았던 국민의힘은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체질 개선에 나서야 했으나 퇴보만 거듭했다. 표면적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의 독선과 계엄이 위기의 원인이지만 본질은 지난 20년간 변화를 거부한 결과다. 진보 진영이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이재명으로 분화하며 중원과 중도를 확장해 온 데 반해 보수 진영은 김영삼 이후 점점 우경화돼 왔고, 두 번의 탄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2003년, 정권을 빼앗긴 뒤 ‘차떼기’ 사건마저 터지면서 해체 위기에 봉착했을 때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소장파는 박근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세우고 소위 ‘천막당사’를 꾸렸다. 공중분해될 것이란 전망을 깨고 121석으로 개헌 저지선 이상을 확보했고, 혁신 공천을 통해 당선된 초선을 중심으로 ‘새정치수요모임’이 조직되고 당내 혁신을 주도했다. 이후로도 민본21, 경제민주화실천모임 등 19대 국회까지 소장파의 명맥이 이어졌다. 이명박과 박근혜 후보 간 치열한 경선이 벌어진 후 본격적으로 계파 대립이 시작됐지만 계파 간 협력적 공생은 유지됐다. 당선 가능성이 크면 상대 계파도 과감하게 공천했고, 내부 총질이라 비판하면서도 당내 소장파를 살려둬야 한다는 공감대도 있었다. 선당후사 정신이 살아있었다.
균형이 무너진 것은 2016년 20대 총선부터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공무원연금 개혁 협상 과정에서 대통령령에 국회가 수정 변경권을 갖게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테이블에 올려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사퇴한다. 이런 갈등을 겪은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에 통치력 강화를 위해 20대 총선에서 이한구 공관위원장을 앞세운 일방적 공천을 강행하며 계파 간 공생 체제를 무너뜨렸다. 김무성의 이른바 ‘옥새런’으로 상징되는 이 갈등과 분열은 결국 2016년 총선 패배로 이어졌고, 약화된 당력으로 인해 최순실 사태에 제대로 대처해내지 못하며 보수 몰락의 서막이 올랐다.
‘갈등 확전’ 대신 ‘차분한 복기’로 변화 시작해야
국민의힘의 쇠퇴는 크게 보면 첫째, 산업화 이후 시대 변화에 조응하는 새로운 보수 이념을 제대로 세워내지 못하면서 지지 기반을 확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세일의 ‘공동체자유주의’, 김종인의 ‘경제민주화’, 유승민의 ‘따뜻한 보수’, 한동훈의 ‘격차 해소’로 이어지는 지지 기반 확장을 위한 이념과 노선 모색을 좌파 이념이라며 번번이 묵살했다. 정당의 이념에 좀 더 많은 대중이 호응할 수 있어야 집권이 가능한데,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원리를 교조적으로 고수했다. 실용적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변화를 위한 이념과 노선 제안들을 짓뭉개버리며 스스로 입지와 기반을 축소시켰다.
둘째, 지난 20년간 세대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민주당이 민주화 투쟁을 상징 자본으로 4050과 60대 초반까지 우군화했지만 국민의힘은 점점 줄어가는 70대만 겨우 붙잡고 있고, 2030세대에게도 비전 제시를 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당내 여러 세력의 공생적 협력체계가 무너졌다. 정당은 ‘한 지붕 다세대 주택’과 같다. 여러 정파와 계파가 공통분모를 공유하며 공존하는 곳이다. 특히 거대 양당 체제에서는 다양한 세력이 공생해야 다양한 계층을 포섭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민주당이 중도보수임을 자처하는 것도 이재명 일극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공학적 포지셔닝이다.
국민의힘은 선거에서 패배하면 원인 분석과 대책 마련보다 책임 전가에 급급했다. 지난 총선과 이번 대선 패배 이후에도 계파 간 갈등만 깊어지고 현실 타개 대책엔 손을 놓았다. 저성장 시대, 보수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이 국가 주도 성장을 내세울 수 없게 됐다. ‘내로남불’ 시비를 떠나 민주당은 복지와 분배, 공정과 정의로 이미지 포지셔닝을 하고 성장까지 말하며 지지기반을 확장하는데, 국민의힘은 정당의 존재 이유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그저 지역구에 내려가 개발 공약이나 민원 해결에 매달릴 뿐이다. 선거든, 정당이든 지지 이유를 분명히 만들어내야 한다.
‘내란’ 프레임에서 한시바삐 벗어나려면 주류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비주류는 분노를 삭여야 한다. 위기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행위도 자제돼야 한다. 더 이상 갈등을 키워서도 안 되고, 걸어 왔던 길을 차분히 복기해야 변화가 시작된다. 당장 ‘보여주기’식 혁신보다 시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잘 구분하고 치료와 치유를 병행해야 한다. 인적 청산, 의사결정 구조, 공천 시스템 같은 당내 민주화와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세심한 분석과 치열한 논쟁을 통해 시대 변화에 따른 이념과 노선 재설정, 세대 변화 대처 같은 중장기적 혁신도 해야 한다. 견제 없는 권력은 무조건 폭주한다. 빨리 일사불란함을 회복해 야당다운 견제를 하는 것이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방도이고 재집권에 이르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