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은 면했는데…한국 경제, ‘15% 관세’ 파고 견딜 수 있을까
최소 15조원 손실에 ‘3500억 달러’ 펀드 조성 부담…“대미 수출액 10% 이상 감소” 이재용·정의선·김동관 발벗고 나섰는데…재계, “정치권, 규제 법안 중단” 호소
한국이 미국과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상호관세 25% 부과를 하루 앞두고 15%로 낮추는 데 합의한 것이다. 재계에선 한국도 일본·유럽연합(EU)과 같은 수준의 관세 합의를 도출하면서 미국 시장에서 동등한 선상에서 경쟁할 최소한의 여건은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미국에 대한 수출 환경은 더 악화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누려왔던 무관세 혜택이 사실상 파기된 상황이다. 3500억 달러에 달하는 대미 투자 패키지도 압박으로 다가올 전망이다. 이미 기업마다 수십조원의 대미 현지 투자를 단행한 상황에서 ‘마른 수건 쥐어짜기’ 식으로 재원을 조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감내해야 할 현실의 벽이 높은 상황에서 기업 활동을 옭아매는 규제 법안 논의를 중단하고 지원책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한미 양국이 7월30일(현지시간)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당초 예상보다 하루 빠른 합의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시간으로 오후 6시16분경 트루스소셜에 글을 올려 “한국은 미국과의 교역에 완전히 개방하기로 하고 자동차와 트럭, 농산물 등 미국산 제품을 받아들이겠다고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국에 대한 15% 관세에 합의했다”며 “미국은 관세를 부과받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에 적용하기로 했던 상호관세 25%를 15%로 하향 조정한 것이다.
日·EU와 동등?…한국 자동차 부담은 더 커
트럼프 대통령은 또 한국이 미국에 35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고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1000억 달러어치를 구매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는 상호관세와 동일한 15%로 설정됐다. 품목관세로 지정된 자동차 관세는 4월3일부터 25%가 부과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농산물 시장 개방을 언급했지만 우려했던 쌀과 소고기 수입 확대는 막았다. 구윤철 부총리는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 통상협의 결과 브리핑’에서 “미국 측은 우리 농업의 민감성을 이해해 추가 시장 개방은 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면서 “비관세 장벽과 관련해 앞으로 검역 절차 개선, 자동차 안전 규정 동등성 인증 상한 폐지를 포함해 기술적 사안에 대해 협의를 계속 이뤄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재계에선 ‘25% 관세 부과’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며 안도하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마냥 웃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15%’라는 결과물 역시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산업연구원이 펴낸 ‘트럼프 신정부 관세정책 영향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기본관세(10%)를 적용하더라도 한국의 대미 수출액은 연간 9.3%(15조8000억원) 감소할 것으로 추정됐다.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0.34%(2024년 기준 7조8000억원) 줄어들 것으로 봤다. 결과적으로 ‘15% 관세’에 따라 한국 경제에 미칠 타격은 더 커질 것이란 분석이다.
이번 합의로 한미 FTA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무관세 혜택을 받아왔던 한국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다는 의미다. 특히 자동차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일본, EU와 동일한 15% 관세를 부과받았지만, 실질적인 관세 인상 폭은 가장 크다. 일본은 기존에 2.5%, EU는 10% 관세를 부담해 왔다는 점에서 한국산 자동차가 향후 가격 측면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것이란 관측이다.
정부도 자동차 관세가 15%로 결정된 것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라고 평가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FTA가 상당히 흔들리고 있는 것”이라며 “최근 각 나라 협상을 보면 WTO, FTA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어 체제 자체가 많이 바뀌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인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경제 6단체는 논평을 통해 “이번 합의는 수출 환경 불확실성을 해소했다는 점은 물론이고 우리 기업들이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주요국과 같거나 더 좋은 조건에서 경쟁하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삼성전자는 7월31일 2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 콜에서 “한미 양국 간 협상 타결을 통해 불확실성이 감소됐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합의 내용의 세부 사항들에 대한 양국 간 추가 논의 과정을 예의주시하고 이에 맞춰 대응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노란봉투법·상법 개정, 글로벌 경쟁력 위축
현대차그룹은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현대차그룹 측은 입장문을 통해 “15%라는 관세가 적용됨에 따라 한국산 자동차의 경쟁력 제고가 중요한 상황”이라며 “현대차·기아는 관세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각적 방안을 추진하는 동시에 품질 및 브랜드 경쟁력 강화와 기술 혁신 등을 통해 내실을 더 다져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미 투자 형식으로 조성될 3500억 달러(약 487조원) 규모의 펀드도 기업 입장에선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대통령실은 조선 분야 1500억 달러를 제외하면 사실상 2000억 달러 수준이며, 이는 일본의 36%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기업들이 이미 상당한 수준의 현지 투자를 단행한 터라 투자 재원 마련에 골머리를 앓을 전망이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 1기 이후 삼성, LG, SK, 현대차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의 대미 투자 규모는 1600억 달러(약 220조원)를 넘는다. 약 10년 동안 미국에 투자했던 규모의 두 배 이상 금액을 다시 조성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경제계는 협상 막판 이재용, 정의선, 김동관 등 기업 총수들까지 지원사격에 나섰다는 점을 고려해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과 상법 개정안 등 국회 입법을 중단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경제 6단체는 “기업 환경을 둘러싼 대외 불확실성이 해소된 만큼 국내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더욱 힘쓰겠다”며 “이를 위해 최근 국회에서 논의 중인 기업 관련 법안이 우리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방향으로 처리될 수 있도록 신중한 검토를 희망한다”고 했다.
재계 관계자는 “관세 협상은 타결됐지만 미국 시장에서 기업 활동이 더 어려워졌다”며 “앞에선 기업들에 도움을 요청하고 뒤에선 국회가 기업을 옥죄는 규제 입법을 쏟아내는 건 겉과 속이 다른 행보”라고 비판했다. 이어 “협상 타결에 재계가 일조한 만큼 대통령실이 교통정리를 해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