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왜 한국과의 협상을 마지막으로 미뤘나

‘출범 한 달’ 정부와 성과 부풀리려는 미국…“늦은 협상이 오히려 긍정적” 해석도 ‘중국과 양다리’ 이재명 정부에 대한 ‘길들이기’ 목적도

2025-07-31     허인회 기자

‘서울→미국 워싱턴DC→뉴욕→스코틀랜드→미국 워싱턴DC’.

미국과 관세 협상을 벌인 한국 정부의 협상팀이 태평양과 대서양을 오가며 숨 가쁜 일정을 소화했다. 관세 협상 시한이 가까워진 상황에서 미국 협상팀의 동선을 쫓아 급박하게 유럽행까지 결정했다. 미국 정부의 고강도 압박 전술은 상상을 넘어섰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일방적인 ‘한미 2+2 통상 협의’ 취소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인천국제공항에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일본과 유럽연합(EU)과 조기에 협상을 타결하는 사이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의 다급함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에 한국이 협상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상황을 놓고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국내 정치 상황으로 인해 제대로 된 협상을 진행할 물리적 시간이 부족했다는 지적과 함께 트럼프 정부의 ‘이재명 정부 길들이기’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는 상황이다. 일각에선 일본과 EU 협상 과정을 지켜보고 난 뒤 협상을 진행한 것이 한국에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단 분석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월2일 미국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상호관세 부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

일본·EU에 비해 더 얻어낼 것이 많지 않았다

관세 협상이 관세 유예 막바지까지 몰린 것은 국내 정치적 요인이 크다. 탄핵과 조기 대선을 치르면서 미국과 협상할 우리 정부의 카운터파트가 부재했던 탓이다. 6월4일 이재명 정부가 들어섰지만 새 정부 출범 이후 첫 통상 고위급 회담은 6월22일에야 이뤄졌다. 통상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수장인 김정관 장관은 임명된 지 사흘 만인 7월23일 첫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관세 부과 시점인 8월1일을 일주일여 앞둔 시점이었다. 최근에야 협상팀 진용이 꾸려진 탓에 미국 측과 심도 있는 협상을 진행하기엔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다는 분석이다.

반면 ‘데드라인’ 전에 협상을 완료한 일본은 접촉면을 꾸준히 확대하며 타결을 끌어냈다. 일본 관세 협상 대표인 이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의 경우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과 15차례, 총 19시간 대화를 나눴다. 수차례 만나며 신뢰를 쌓은 러트닉 장관은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에게 ‘트럼프 면담 예행연습’까지 시켜주기도 했다.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은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과는 7차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와도 3차례 협의를 진행했다.

‘상호관세율 15% 합의’를 끌어낸 EU도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협상의 기틀을 마련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무역·경제안보 집행위원은 올해 2월 이후 워싱턴DC를 7차례나 방문해 미국 측 협상팀과 꾸준히 접촉했다. 대면 접촉 외에도 전화통화와 영상통화를 합쳐 100시간 이상 대화하는 등 미 협상팀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한국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이미 한미 FTA를 통해 미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 기업들도 이미 220조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한 상황이었다. 한국과의 무역에서 발생하는 적자가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경제력으로 볼 때 유사한 규모를 요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협상 실적을 포장해 미국 국민에게 알리려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매력적인 카드가 아니었다.

쌀과 소고기 수입 확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줄기차게 농산물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대표적으로 미국산 쌀 수입 확대와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이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난색을 표했다.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 쌀 협정에 따라 미국, 중국, 호주, 태국, 베트남 등 5개국에 연간 40만8700톤의 무관세 수입물량(TRQ)을 배분하고 있다. 국가별 쿼터가 정해져 있어 미국만 물량을 늘리기 어렵다. WTO 협정 위반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미국의 소고기 수입 확대 압박도 상당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훌륭한 우리 소고기를 거부하는 다른 국가들은 경고를 받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 등 소고기 시장 개방 압박 수위를 높였다. 그러나 광우병 파동으로 30개월령 이상 소고기에 대한 국민 정서가 여전히 민감하고 농민단체들의 반발 역시 상당히 거세다. 미국산 소고기 최대 수입국이 한국이란 점에서 무작정 수입을 늘려 달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이번 협상에서 정부는 삼성·SK·현대차·LG 등 주요 그룹을 중심으로 1000억 달러(약 137조원) 이상 규모의 대미 투자계획을 준비했다. 그러나 미국 측이 4000억 달러(약 553조원) 규모의 투자를 고수하면서 협상의 막판 쟁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펀드 조성, LNG 수입 확대 등 3500억 달러 투자펀드 조성 등으로 막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일본과 EU보다 협상을 늦게 체결한 것이 한국에 유리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자동차를 포함한 관세율 15%라는 가이드라인이 설정됐다. 이에 더해 천문학적 투자에 대한 해석 차이에 따른 일종의 대비도 이뤄졌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일본과 해석 차이에 대해 질문도 많이 했다. 펀드 수익 구조에 대해서도 많이 토론했다”며 “우리 나름대로 비망록 방식으로 (협상 내용을) 확보해 놨다”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AFP연합

새 정부 ‘길들이기’ 차원이었나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협상 타결 소식을 전하며 이재명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이나 EU와의 협상 결과에선 없는 부분이었다. 한국과의 협상과 정상회담을 연계시켰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이를 놓고 ‘이재명 정부 길들이기’를 시도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특히 미국 공화당 일각에선 이재명 정부가 표방하는 실용외교에 의구심을 표출하기도 했다. 공화당 소속 브라이언 매스트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은 7월24일 골드국제전략연구소가 주최한 콘퍼런스에서 화상으로 연설하며 한미동맹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다리’(play both side)를 걸치지 않아야 한다”며 “미국은 이를 모욕으로 여길 것”이라고 답했다. 한국이 대중 견제와 관련해 분명한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매스트 위원장은 “(한국의) 일부 사람들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배를 모두 떠받치려 한다”며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려 하면 결국 모두가 피해를 볼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특히 “이 배에 한 손, 다른 배에 한 손을 올려 두 배를 동시에 지탱하려는 시도는 결코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며 “나는 이 비유를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도 적용한다. 미·중을 동시에 지탱하려면 결국 그 시도는 실패할 것이며 관계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고위급 관리는 “이재명 정부가 친중(親中) 정부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한 가운데 미국 측이 관세 협상에 속도를 내지 않은 것은 이재명 정부를 향한 일종의 ‘길들이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한국과의 관세 협상을 뒤로 미룬 것은 이 같은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