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심장, ‘다름’을 존중하는 힘[박용후의 관점]
성(性)과 정치, 불편한 대화 속에서 강한 자아 길러져 서로 다른 선택 존중할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살아 숨 쉰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 제도나 헌법 조항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뿌리는 우리의 일상적 태도와 문화 속에 있다. 그 핵심에는 두 가지 기둥이 있다. 첫째,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 둘째,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자기결정권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소속된 집단의 분위기와 암묵적 규칙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그렇다. 모임에서 정치 이야기를 꺼내면 대화가 곧바로 감정싸움으로 번지기 쉽고, 성(性)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리 진지한 목적이 있어도 ‘수치스럽다’는 시선 속에서 비난받기 쉽다. 건전한 문제 제기조차 단어 하나에 대한 개인적 감수성 차이를 이유로 공격당할 수 있기에, 사람들은 불편한 주제를 회피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생각’을 꺼내는 용기를 잃어간다.
국기 사진이 던진 질문, 성(性)은 왜 이토록 민감한가?
얼마 전 아내가 유럽여행을 다녀와 반 고흐 미술관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여러 나라의 국기가 게양된 장면이었다. 의미가 무엇일지 묻자, 아내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동성애를 처벌하는 나라들의 국기이고, 처벌의 강도에 따라 순서가 정해져 있더라.” 그중에는 동성애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나라들도 있었는데, 그 수는 상상보다 훨씬 많았다.
이 사례는 성에 대한 관념이 문화와 제도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수용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성적 지향을 자유로운 개인의 권리로 보지만, 다른 쪽에서는 범죄로 규정하고 생명까지 빼앗는 중범죄로 취급한다. 성은 이처럼 사회마다 받아들이는 정도가 극단적으로 다르며, 동시에 가장 민감한 주제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성에 대한 회피나 금기는 민주주의의 건강성과도 직결된다. 독일과 한국의 성교육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분명하다. 독일 초등학교에서는 임신과 출산 과정을 과학적으로 배우지만, 한국에서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식의 농담으로 얼버무린다.
김누리 교수는 이를 민주주의와 연결 지어 설명한다.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주제를 터부시하는 사회는 아이들에게 ‘쉬쉬하는 습관’을 심어준다. 욕구를 죄책감과 연결시키는 문화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하는 약한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약한 자아를 가진 개인은 부당한 권력이나 다수의 압력 앞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쉽게 굴복한다. 이는 결국 민주주의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본질,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않는 것
민주주의는 강한 자아를 가진 시민에게서 시작된다. 강한 자아는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의 차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환경 속에서 자란다. 성교육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를 ‘틀린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사실로 배우듯, 사회적 가치관의 차이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결정권은 그 연장선에 있다. 정치적 신념에서 생활 방식, 성적 지향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내린 선택을 사회가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 내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름이 사회를 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믿음. 이것이 민주주의를 살아 있는 문화로 만드는 힘이다.
민주주의적 태도는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교육과 일상 속 실천이 핵심이다.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관점과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적’이 아니라 ‘또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투표소에서의 한 표로 끝나지 않는다. 친구와 정치적 의견이 달라도 유머로 넘길 수 있는 여유, 성(性)에 관한 대화를 건강한 지식의 영역에서 다루는 태도, 상대방의 선택을 내 선택만큼 존중하는 마음.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민주주의를 지탱한다.
민주주의는 법과 제도를 넘어, 서로 다른 생각이 부딪히는 순간을 피하지 않고 그 안에서 배우고 성장하려는 열린 태도에 뿌리내린다.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지 않는 문화, 그리고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태도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소중한 심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