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5000’ 위해 경영권 방어막 해제? 자사주 소각 의무화 괜찮나

정기국회에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 담은 상법 개정안 처리 유력 분주해진 재계, 지분교환·교환사채 발행 등 임시방편 대응

2025-08-25     이승용 시사저널e. 기자

약 22년 전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외국 헤지펀드에 넘어갈 뻔한 일이 있었다. 재계에선 이를 소버린 사태라고 부른다. 2003년 영국계 헤지펀드 소버린자산운용이 SK㈜ 지분 약 15%를 매입한 뒤 최태원 회장 퇴진과 전문경영인 체제를 요구하며 벌어진 경영권 분쟁이었다. SK그룹은 당시 자사주 4.5%를 채권 은행 등 우호 세력에 매각하는 방식으로 가까스로 경영권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기업들은 경영권 방어 목적으로 자사주를 보유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일종의 대표적인 ‘방어막’인 셈이다. 주가 안정과 주주환원 명분으로 자사주를 매입한 뒤 이를 의결권 확보, 우호지분 형성, 적대적 M&A 방어 장치로 활용했다. 최근까지도 경영권 분쟁이나 대주주 리스크가 부각될 때 자사주가 자주 동원됐다.

7월3일 국회 본회의에서 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자사주 활용한 경영권 방어 어려워져

그런데 이 같은 자사주를 활용한 경영권 방어가 앞으로는 불가능해질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안이 속속 발의되고 있어서다. 자사주 소각은 강력한 주주 가치 제고 정책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해결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주식 수가 줄어 주당 순이익이 증가하고 기존 주주의 지분율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이 이끌었던 버크셔해서웨이는 배당 없이 자사주 매입 후 소각만을 고집하는 주주환원 정책으로 유명하다. ‘코스피 5000’을 향한 정책 설정에 개미들까지 환호하며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안 처리가 가시화하자 재계는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다.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민주당 의원들은 복수의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김남근 의원은 지난 7월 자사주 소각 관련 내용을 담은 상법 일부개정법률안(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자사주는 원칙적으로 취득 후 1년 이내 소각하도록 하고 예외적으로 임직원 보상 등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허용하고 있다. 민병덕 의원은 신규 취득 자사주를 1년 이내 의무적으로 소각하고 발행주식 총수의 3% 미만인 경우 2년까지 소각을 유예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김현정 의원의 경우 기존 보유 자사주는 6개월 이내에, 신규 자사주는 취득 즉시 소각하도록 하는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외에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 역시 자사주를 취득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소각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문제는 경영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데 있다. 대기업 오너 일가의 지배력이 높지 않은 지주사들의 경우 자사주 비중이 높은 경우가 많다. 실제로 올 1분기 기준 SK그룹 지주사인 SK의 자사주 비중은 24.81%였고, 롯데그룹 지주사인 롯데지주는 32.51%였다. 이 외에 HD현대 10.54%, LS 15.07%, 두산 17.92%, CJ 7.26%다.

대기업뿐 아니라 국내 상장사 대부분이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 1분기 말 기준 국내 2601개 상장사 중 자사주를 가지고 있는 회사는 총 1772개사로 68.1%에 달했다. 자사주가 전체 발행주식의 5% 이상인 상장사는 517개사, 10% 이상 230개사, 15% 이상 118개사, 20% 이상 62개사, 30% 이상은 16개사였다.

국내 상장사들이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보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사주가 경영권 방어에 활용될 수 있어서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다른 회사로 넘어가면 의결권이 부활한다. 우리나라는 최대주주나 경영진이 외부의 경영권 위협에 대비해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SK 최대주주인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기업들이 여러 이유로 자사주를 활용하기 위해 매입했는데, 의무 소각이 현실화하면 기업들이 자사주를 살지 의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향후 국회에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안이 통과되면 이같이 자사주를 활용한 경영권 방어는 불가능해진다. 다만 국회 법안 통과 과정에서 신규 취득 자사주에 대해서만 소각 의무를 부여할지 아니면 기존 보유 자사주도 소각하도록 강제할지는 미지수다. 재계의 요청이 수용돼 기존 보유 자사주 소각 의무가 없는 법안이 통과된다면 사실상 주가 부양 효과는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 기업, 자사주 의결권 부활에 적극 나서

몇몇 기업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선제적으로 자사주 의결권을 미리 부활시키는 방안을 실행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자사주 의결권 부활 방법은 외부 매각 혹은 지분교환이다. 롯데지주는 지난 6월 1450억원에 달하는 자사주 5%를 롯데물산에 매각했다. 이를 통해 롯데지주의 자사주 비중은 32.51%에서 27.51%로 감소했고, 롯데물산에 매각한 자사주 5%의 의결권은 부활했다. 이러한 자사주 매각이나 교환은 상호 간에 여러 조건과 이해관계가 맞아야 가능하다.

자사주 매각이나 교환 대상을 찾기 어렵다면 교환사채(EB) 발행도 대안이 될 수 있다. 교환사채는 발행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과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이다. 자사주를 대상으로 교환사채를 발행하면 경영권 분쟁 시 외부 투자자가 대여금을 주식으로 전환해 잠재적 우호 세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교환사채 발행도 마냥 쉬운 것은 아니다. 태광산업처럼 교환사채 발행에 실패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태광산업은 지난 6월 자사주 전량(24.41%)을 대상으로 3186억원 규모의 교환사채 발행을 시도했지만 2대 주주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이 법원에 교환사채 발행 금지 가처분을 내는 등 반발하고 주관사인 한국투자증권도 발행에 소극적이면서 EB 발행이 무기한 연기된 상태다.

교환사채 발행조차 쉽지 않은 상장사들은 최근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상여금 지급을 늘리고 있다. 임직원들에게 상여금으로 현금 대신 기존 자사주를 지급하면 개인 명의 주식이 되면서 의결권이 부활한다. 사내근로복지기금도 대안이다. 자사주를 사내복지기금에 증여하면 기금이 소유한 주식으로 전환되면서 의결권이 부활한다. 한진칼의 경우 지난 5월 이사회에서 전체 발행주식의 0.66%에 해당하는 자사주 44만44주를 사내근로복지기금에 출연했다. 이를 통해 조원태 회장 측 의결권은 기존 20.02%에서 20.68%로 늘어났고, 지분 18.46%를 가진 호반그룹 측과 격차를 벌릴 수 있었다.

양도제한조건부주식(RSU)도 새로운 자사주 활용 방법으로 조명받고 있다. RSU는 임직원이 일정 기간 근무나 조건을 충족할 경우 주식을 무상으로 지급하는 제도로, 기존 보유한 자사주를 성과급 형태로 지급할 수 있다. 특히 RSU는 자사주를 경영 승계에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으로도 조명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