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물에서 車·반도체까지’ 미국에서 생산…10년 후 대한민국엔 무엇이 남아있을까 [최준영의 글로벌 워치]

‘제조업 공동화’ 우려, 트럼프가 불러온 나비효과…“공장 떠나면 일자리도 붕괴” 국내 생산기반 약화→양질의 일자리 감소…포항·여수, 美 러스트 벨트처럼 될 수도

2025-08-30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한미 정상회담이 막을 내렸다. 매번 관심이 집중되는 한미 정상회담이지만 이번에는 더 특별했다.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미국이 아닌 일본을 먼저 방문했으며, 외교·안보 라인이 아닌 비서실장까지 워싱턴을 방문했고, 정상회담이 생중계됐다. 특히 회담 직전 트럼프가 트루스소셜에 내란 특검 수사 과정에서 진행된 교회 및 군 시설 압수수색을 비난하는 내용을 올려 과연 회담이 잘 진행될 것인지 우려되기도 했다. 하지만 회담 자체는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잘 마무리됐다. 조선업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대미 투자와 북한 관련 논의가 트럼프를 흡족하게 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회담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별도로 실제 회담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정상회담을 마치고 나면 공동성명 또는 공동선언문 등을 통해 양측의 합의 내용을 발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서로 정리된 내용은 추후 양국 간 세부적인 협상의 기준점이 된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어떠한 공식 문서도 발표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주한미군 역할 조정, 방위비 분담 확대 등 핵심 이슈들은 해결되지 못했다. 상호 인식 차이와 이견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정상회담을 통해 정리가 이뤄지지 못했기에 불확실성은 남아있다. 트럼프의 스타일을 고려했을 때 문서로 정리되었더라도 구속력을 발휘하진 못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그래도 문서화된 결과가 없다는 점은 두고두고 우리를 괴롭힐 가능성이 높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앞으로 우리 기업들의 대미 투자가 제조업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진행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8월26일(현지시간) 미국 필라델피아 한화 필리조선소를 방문한 모습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8월26일(현지시간) 미국 필라델피아 한화 필리조선소를 방문한 모습 ⓒ연합뉴스

‘제조업 대한민국’ 붕괴 초읽기?

미국은 2018년 미·중 무역분쟁을 시작으로 중국에 대한 압박과 견제를 본격화했다. 이러한 기조는 바이든 대통령 때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자신들이 과도할 정도로 중국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특히 미국 내 제조업 역량이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트럼프는 과거 민주당을 지지했지만 산업의 몰락으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한 주요 산업 지역의 백인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선거에 승리할 수 있었다. 트럼프로서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취약한 제조업은 단순히 일자리 확보를 넘어 미국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로 받아들여지면서 이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가 미국 정치권의 핵심 과제로 등장하게 됐다. 

미 제조업의 약화는 1970년대 오일 쇼크와 일본과 서독 등의 성장에 따라 본격화됐다. 수입품에 밀려 수익성이 약화된 미국 기업을 지켜보던 금융자본은 1980년대 들어 미국 기업들에 제조업의 수직계열화를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자산을 매각하거나 유동화하기 시작했다. 조립과 같은 저부가가치 생산 과정이 해외 아웃소싱으로 넘어가면서 많은 일자리가 멕시코 또는 동아시아로 빠져나갔다.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1980년대 초반 갑자기 나이키 운동화 붐이 불었던 것도 미국이 한국 업체에 OEM 방식으로 운동화를 생산하도록 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미 제조업의 급속한 위축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술 습득과 시장 확대라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국을 포함한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저렴한 인건비 위주의 제조업에서 점차 탈피할 수 있었다. 4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한국은 선진국이 됐다. 미국 역시 엄청난 성장을 거듭했다. 과거 미국과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섰던 일본과 유럽연합(EU)은 이제 경제 규모 및 기술력에서 미국의 경쟁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은 3000만 개 이상의 제조업 일자리를 상실했으며 극심한 양극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21세기 들어 여러 미국 대통령은 제조업 부흥과 일자리 회복을 주장했다. 셰일 혁명을 통해 저렴해진 미국 에너지 가격은 제조업 부흥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미국 기업들에 의해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급망은 미국의 의도를 무너뜨렸다. 가장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비싸고 힘들게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 미국에서 제조업을 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 흐름을 뒤집겠다고 선언했다. 관세를 통해 미국 시장 진입장벽을 높이고, 관세를 부담하기 싫으면 미국에 공장을 짓고 미국인들을 고용해 생산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트럼프의 정책이 미 경제를 어렵게 할 것이라고 했지만, 물가나 고용은 큰 문제가 없으며 미 정부의 관세 수입은 예상했던 5000억 달러를 뛰어넘어 1조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일레인 차오 전 미국 교통부 장관이 8월26일(현지시간) 미국 필라델피아 한화 필리조선소에서 열린 ‘스테이트 오브 메인’호 명명식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美 압력·생산비용 상승 ‘이중고’ 겪는 기업들

상황이 이렇자 미국에 제품을 수출하던 거의 모든 기업은 대미 투자를 늘리고 있다. 특히 한국 기업들은 투자 확대에 적극적이다. 고율 관세로 중국 제품이 경쟁력을 잃고 있는 미국 시장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몇 년간 급속히 상승한 인건비와 전력요금 등 생산비용 증가는 한국에서 경쟁력 있는 제조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다. 미국의 압력과 국내 여건 악화가 결합되면서 기업들의 등을 떠밀고 있다. 조선업을 시작으로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 반도체 등 한국을 떠받치고 있는 대표적 산업 모두 미국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많은 이가 지적하는 것처럼 인건비가 비싸고 제조업 마인드가 없는 미국에서 제조업을 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렵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미국이라는 좋은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은 남들보다 더 빠르고 더 크게 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업들의 미국 투자는 수익에 대한 평가나 분석이 아닌 당위의 영역으로 변하고 있다. 모두가 떠날 준비를 하는 상황에서 과연 몇 년 후에 무엇이 대한민국에 남아있을지 생각해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대한민국의 급속한 성장은 우리의 노력과 더불어 유리한 대외 여건의 덕이 컸다. 지난 40년간 우리가 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었던 흐름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제철소와 석유화학단지 같은 ‘중후장대’형 산업들은 어디로 갈 수 없으며 영원히 한국에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확신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점을 우리는 유럽과 미국의 수많은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기업의 최대 목표는 생존이고,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포항과 여수가 미국의 러스트 벨트처럼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