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롤러코스터’ 韓美 첫 만남…‘칭찬 외교’로 반전, ‘쌓인 청구서’가 관건

트럼프 ‘숙청’ 메시지에 온 나라가 일순간 긴장…강훈식의 선제 설득 카드로 ‘진화’ ‘친중·반일’ 우려 씻고 10월 트럼프 방한 약속 ‘성과’…李, 대화 표현·선물까지 철저히 준비 공동성명 불발에 우려 목소리도…농축산물 개방·주한미군 등 통상·안보 리스크 여전

2025-08-29     박성의 기자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숙청이나 혁명이 일어난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곳에서 사업을 할 수 없다.”(현지시간 8월25일 오전 10시35분, 트루스소셜에서)

“이 자리에 함께하게 되어 큰 영광이다. 대선 승리를 축하한다. 우리는 100% 당신과 함께할 것이다.”(현지시간 8월25일 오후 1시25분, 한미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8월25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미국 측 수행원들을 소개받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숙청” 트럼프 SNS 충격파→“마스가”로 분위기 반전

불과 3시간 사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민국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요동쳤다. 한미 정상회담 직전 트럼프 대통령이 SNS에 ‘3대 특검’(김건희·내란·채 상병)을 비판하는 듯한 글을 올리자 정부·여당은 일순간 긴장에 휩싸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이재명 대통령의 재치 있는 발언으로 급반전됐다. “당신은 피스 메이커(Peace Maker), 나는 페이스메이커(Pacemaker)”라는 이 대통령의 칭찬에 트럼프는 크게 웃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렇게 이재명 정부의 첫 한미 정상회담은 극적인 반전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제 ‘정산의 시간’이다. 이 대통령이 선방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이번 한미 정상회담 후 쌓인 청구서는 산적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꺼내든 ‘주한미군 부지 소유권 이전’ 문제가 한미 관계의 새 뇌관으로 부상한 가운데, 이 대통령이 방미 기간에 기존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기조 변경을 시사하면서 대중 관계 관리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던 이 대통령의 공언과 달리 북한의 반발은 날로 거칠어지고 있다. 하나를 풀면 하나가 꼬이는 외교의 고난도 고차방정식 앞, 이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한미 관계뿐 아니라 정부의 성패가 갈릴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친중(親中) 정치인’, 이 대통령 앞에는 늘 이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중국에도 셰셰(謝謝·고맙습니다)하고 대만에도 셰셰하면 된다”는 이 대통령의 실용외교 노선은 보수진영으로부터 늘 ‘한미 동맹의 걸림돌이 될 것’이란 우려를 낳았다. 그때마다 이 대통령과 여당은 기우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첫 한미 정상회담 직전 이 같은 우려는 현실이 되는 듯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불과 3시간여 앞두고 SNS에 ‘3대 특검’을 비판하는 듯한 글을 올리면서다.

취재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실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해당 글의 진위 여부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짜뉴스’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 뒤 대통령실에는 비상이 걸렸다. 세계 각국 정상들을 당황케 했던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오벌오피스(미 대통령 집무실) 매복 공격’이 재현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고개를 들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직전 게시물의 의미를 묻는 취재진 질문에 “최근 한국에서 새 정부에 의한 교회와 미군기지 압수수색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됐을 일”이라고 발언하며, 마치 이 대통령의 정적(政敵)처럼 특검 수사를 맹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층인 ‘마가(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력 중에서도 트럼프의 종교적 멘토들을 한국의 보수층과 종교계 등이 움직였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이재명 대통령이 8월25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 ⓒ연합뉴스

2인자 비서실장 간 핫라인 개설 주효

이에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정상회담 약 2시간여 전에 자신의 카운터파트이자, 트럼프 대통령의 두 차례 대선 승리를 이끈 ‘백악관의 실세’ 수지 와일스 백악관 비서실장을 40분간 만나 특검 수사 등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강 비서실장은 한미 정상회담 직후 기자들을 만나 “트럼프 대통령의 SNS 글 때문에 저희가 당황했다”며 “비서실장 면담에서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도록 말했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사실관계를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후 파행 가능성까지 거론되던 회담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이 대통령은 회담 시작 후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미국이 다시 위대하게 변하고 있는 것 같다”며 ‘칭찬 세례’를 펼쳤고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에는 점차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백미는 ‘피스 메이커·페이스메이커’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목표 중 하나가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점에 착안해 “대통령께서 피스 메이커를 하시면, 저는 페이스메이커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100% 우리는 당신과 함께할 것”이라고 웃으며 화답했다. 앞선 SNS ‘특검 저격’ 역시 “오해였다”며 물러섰다. ‘최악의 상황’을 우려했던 대통령실, 여권 관계자들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무난하게 마무리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이 ‘선방했다’는 평가는 양국 모두에서 지배적으로 나오고 있다. 우선 이재명 정부의 약한 고리로 평가됐던 ‘친중 논란’이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어느 정도 불식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8월25일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초청 강연에서 중국과의 경제 협력과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병행하는 이른바 ‘안미경중’ 노선과 관련해 “한국이 과거처럼 이 같은 태도를 취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됐다”고 밝혔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택하는 대신 ‘한미 동맹의 선명성’을 강조하며 미국의 불신을 걷어낸 셈이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이번 회담을 통해 두 정상이 상당한 신뢰를 형성했다. ‘현실주의적 진보 외교노선’을 택한 이 대통령에겐 굉장한 힘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실질적인 성과도 있었다. 일단 가장 우려했던 추가 관세 압박을 피해 갔다. 여기에 농축산물 추가 개방 문제, 방위비 증액 문제 등도 정상회담에서는 거론되지 않았다. 한미 양국은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실무 협의를 진행하며 대통령비서실장 간 핫라인 개설이라는 부수적 성과도 얻었다.

이재명 대통령(오른쪽)이 8월25일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방명록 서명을 준비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안내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친중 딱지’ 뗀 李, 중국의 반발은 ‘변수’

특히 오는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트럼프 대통령이 첨석한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이 대통령은 이번 회담에서 APEC 정상회의에 트럼프 대통령을 초청하면서 “가능하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만남도 추진해 보자”고 제안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매우 슬기로운 제안”이라고 화답했다.

그러나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실익’에 대해 의문부호를 붙이는 이도 적지 않다. 이 대통령의 정치적 이익과 별개로 국익 측면에서 리스크(위협)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야권에서는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방미 결과”(김기현 의원), “이재명 대통령이 리스크는 피했지만 체면치레를 위해 국민에게 최대의 부담을 안겨줬다”(나경원 의원), “우파 대통령이 가서 이랬다면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난리가 났을 것”(성일종 의원)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실제 정상회담 이후에도 ‘마가’를 앞세운 트럼프 행정부의 노골적인 통상 압박이 계속되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정상회담 직후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우리 농민과 제조업자, 혁신가를 위해 시장을 계속 개척할 것”이라고 밝히며, 농축산물 추가 개방 요구가 언제든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기지 부지의 소유권’을 요구한 점도 변수로 꼽힌다. 영토 주권 등을 명시한 우리 헌법에 위배될 뿐 아니라 미국 측이 얻을 실익도 크지 않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이 낮은 제안이라는 분석이 많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견제를 위해, 방위비 분담금 확대를 위한 협상 카드로서 해당 요구를 더 강하게 해올 경우 정부도 대응 수위를 두고 고심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실제 국방비 증액 외 ‘동맹 현대화’ 가운데 주요 이슈인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방위비 분담금 확대에 대해서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던진 ‘안미경중 노선 변경’ 및 ‘대북 관계에서의 페이스메이커 역할’ 발언에 대한 역풍도 일기 시작했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는 8월27일 사설에서 “안미경중을 ‘과거형’으로 규정하고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구실로 미국에 더욱 종속되는 것은 한국의 국가 이익을 스스로 제약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날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 대통령이 방미 기간에 ‘한반도 비핵화’ 발언을 한 데 대해 “아직도 헛된 기대를 점쳐보는 것은 너무도 허망한 망상”이라고 비난했다.

안병진 교수는 “미국의 국방 핵심 관계자들은 한국과의 관계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한·미·일 협력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과 별개”라며 “이런 가운데 이 대통령의 ‘안미경중’ 불가 발언으로 중국이 한국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대통령뿐 아니라 정부의 외교 실무자들이 이 뇌관을 어떻게 조율하는지가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