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둘러싼 ‘여섯 남자’의 고차방정식 외교전…‘10월 경주’가 분수령

‘신냉전 최전선’에 선 한반도 운명…김정은-시진핑-푸틴 ‘反美 연대’ 과시 ‘다자외교 데뷔’한 김정은…시진핑 ‘왼팔’ 대우받으며 신냉전 핵심 축으로 부상 결속하는 反美 ‘핵 트리오’ 북·중·러…시험대 오른 李 실용외교, 중재외교 통할까

2025-09-05     변문우 기자
(왼쪽 위부터)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이재명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 ⓒEPA 연합·Kyodo 연합·연합뉴스·신화사 연합·AP 연합

“진보와 반동의 힘겨루기 속, 오늘날 인류는 평화냐 전쟁이냐 선택의 기로 앞에 있다.” 왼쪽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오른쪽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대동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9월3일 진행된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신(新)냉전’으로 읽히는 “새로운 시대” 메시지를 공언하며 한반도 정세는 다시 ‘폭풍전야’에 휩싸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에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양자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일’ 3국 공조 체제를 강화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발생한 정치적 후폭풍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화 손짓에 흔들렸던 김정은 위원장도 마음을 닫은 모습이다. 집권 14년 만의 다자외교 데뷔전을 위해 중국행 열차에 싣고 온 전용차량 번호판에는 ‘7·271953’이 새겨져 있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일인 1953년 7월27일은 북한에서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일로 지정돼 있다. 결국 전쟁 상대국이었던 미국의 비핵화 압박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내포된 셈이다. 이후 김 위원장은 시 주석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밀담’을 나누고, 톈안먼 망루에 올라 북·중·러 수장이 66년 만에 한자리에서 사진을 찍는 ‘역사적 순간’을 연출했다.

이렇게 보면 김 위원장의 중국행은 ①북·중·러 3국의 ‘반(反)트럼프’ 연대를 강화해 한·미·일 공조 전선에 대항하기 위한 결단으로 비친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손익계산을 따져보면 오히려 이 같은 모습은 6년 전과 마찬가지로 ②북·미 대화로 다시 나아가기 위한 전략적 포석일 가능성도 있다. 김 위원장은 2019년 트럼프 1기 행정부와 협상에 나서기 전에 전격 중국을 방문해 시 주석과 사전 교감을 나눈 바 있다. 웅크리고 있던 김 위원장이 중국과 러시아를 뒷배 삼아 ‘몸값’을 올린 후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나서는 셈이다. 결국 어떤 시나리오가 전개되든 6년간 사실상 멈췄던 ③한반도를 둘러싼 미·일·중·러 4강의 움직임이 재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과의 고차방정식 외교전 결과에 ‘한반도 운명’과 ‘이재명표 실용외교’ 점수가 좌우될 전망이다.

 

‘중·러 밀착’ 통해 ‘대미 협상력’ 올린 김정은

“김 위원장은 시 주석, 푸틴 대통령과 나란히 톈안먼에 서서 ‘삼각연대’를 재현할 것이다. 북·중 관계 복원을 통한 대외 운신 폭을 확대하고, 중국의 경제적 지원을 견인해 체제 활로를 모색하려는 의도에서다.”

국가정보원이 최근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회의에서 내놓은 전망대로 김 위원장은 시 주석, 푸틴 대통령과 맨 앞에 서서 ‘반(反)서방 연대’ 수장 중 한 명으로서 지위를 공고히 했다. 특히 톈안먼 망루로 이동 중 시 주석이 광장을 가리키며 설명하자 김 위원장이 뒷짐을 진 채 경청하는 장면도 포착됐다. 김 위원장이 다자외교 무대 첫 데뷔라는 어려운 결정을 통해 만든 자리인지라 외신들도 “‘고립된 왕따’ 이미지를 탈피하고 ‘글로벌 플레이어’로 변모했다(블룸버그통신)” 등의 평가를 내놓으며 대내외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들은 서방 연대를 향한 경고장 성격의 ‘무력’도 함께 과시했다. 먼저 김 위원장은 방중 직전인 9월1일 자국의 미사일총국 산하 화학재료종합연구소를 방문해 다음 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사용될 신형 대출력 미사일 발동기(엔진) 모습을 살짝 노출했다. 여기에 중국은 열병식에서 전 지구를 사정권에 두는 ICBM인 ‘둥펑(東風·DF)-5C’를 공개했다. 미국 항공모함을 원거리에서 타격할 수 있는 극초음속 미사일인 ‘잉지(鷹擊·YJ)-21’, 미국 전역을 사정권으로 하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인 ‘쥐랑(巨浪·JL)-3’ 등도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북·중·러 3국 정상이 합작해 과거 ‘미·소 냉전’에 버금가는 ‘미·중 신냉전’ 구도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형국으로 풀이된다. 일단 김 위원장 입장에선 그간 러시아와 군사동맹을 맺고 파병을 감행하는 등 밀착하는 과정에서 소원해진 북·중 관계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열병식 행사 직후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러 관계의 연속성을 보여준 것은 물론, 이 자리에서 ‘우크라이나전 북한군 파병’ 건에 대해서도 양측은 서로 “형제의 의무”라고 치켜세우며 감사를 표시했다. 종전 압박을 가하는 미국을 향해 반기를 든 셈이다.

다만 일각에선 김 위원장의 이번 행보가 향후 미국과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포석의 일환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근거는 ‘역사적 경험’에 있다. 앞서 김 위원장은 6년 전인 2019년 싱가포르와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1·2차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중국을 직접 방문해 시 주석을 만났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이재명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김 위원장을 올해 다시 만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 만큼, 미국과의 대화에 나서기 전에 다소 냉랭해진 중국과의 관계를 풀어야 한다고 김 위원장이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시 주석 입장에서도 비슷한 심정을 느꼈을 것으로 예측된다. 그간 중국을 패싱한 북·러 양국의 밀착에 다소 불편한 감정도 있었겠지만, 향후 미국과의 패권경쟁에서 중국은 어느 때보다 우방국이 절실한 상황이다. 특히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전쟁으로 인도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반(反)트럼프’ 연대를 구축하는 상황에서 이번 열병식 행사로 중국은 존재감과 함께 리더십을 보여주는 효과를 노릴 수 있다.

이들의 밀착을 바라보는 트럼프 대통령도 초조함을 내비치는 모습이다. 그는  SNS에 시 주석을 향해 “오래도록 기억될 멋진 날을 맞이하기 바란다. 미국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푸틴 대통령과 김 위원장에게도 따뜻한 안부를 전해 달라”고 비꼬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이와 관련해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통화에서 “북한은 미국이 양보하지 않는 이상 급할 것이 없다. 오히려 미국에 대한 양보를 압박하는 차원에서 대중·대러 관계를 심화 및 발전시키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9월3일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 참석한 모습 ⓒTASS 연합

李 대통령, APEC 회의 통해 ‘새판’ 짤까 

그간 미·일 우방국과의 외교전을 리스크 없이 치르고 한숨 돌렸던 이 대통령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모습이다. 취재에 따르면, 당초 이 대통령은 10월31일부터 이틀간 경주에서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계기로 북·미 정상회담 환경을 조성한 후 한국까지 대화의 장에 가세하는 그림을 그려왔다.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이뤄졌던 ‘남·북·미 정상회담’을 재현하는 구상이다. 해당 계획에 대해 박상병 정치평론가도 통화에서 “2차 대전 이후 사실상 신냉전 상황이 진행되는 속에서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북한이 기대와 달리 중·러와 더욱 가까이 밀착하면서 이 대통령의 플랜에는 차질이 생겼다. 북한은 이재명 정부의 대북 확성기 철거를 비롯한 햇볕 기조에도 ‘적대적 두 국가’ 방침을 여전히 고수하며 철저히 한국을 적대시하는 모습이다. 물론 이번 행사에 참석한 우원식 국회의장이 김 위원장과 열병식 직전  악수와 함께 짧은 대화를 나눈 데 이어 푸틴 대통령을 통해서도 ‘남북 평화 촉구’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정상회담만큼의 효과는 내지 못할 것으로 예측된다.

또 이 대통령이 한반도 정세 주도권을 잡으려는 상황에서 중국이 향후 어떻게 반응할지도 중요 변수가 될 수 있다. 아직 이 대통령은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가지지 못한 상황이다. 특히 최근 이 대통령이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기조까지 공식 폐기한 만큼 한중 관계에도 경고음이 울린 상태다. 중국 외교부도 “중한 관계가 제3자의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며 한국에 엄포를 놓았다. 이 대통령 입장에선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임을출 교수는 “시 주석과는 대북이나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견인해 나갈지 의견을 나누지 못했다. 이 부분이 최대 관건”이라며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끔 해서 남북대화의 첫 물꼬라도 트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나 러시아가 자신들의 입지를 고려해 어떤 견제구를 던질지도 미지수인 상황이다. 이시바 총리와 푸틴 대통령은 남북 관계의 현상 유지와 극적 변화를 두고 어떤 시나리오가 자신들에게 유리할 지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 당연하다.

결국 이 대통령의 집권 초 ‘외치(外治) 점수’와 ‘한반도의 운명’은 10월말 ‘APEC 슈퍼위크’가 진행되는 경주에서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일단 한국의 우방국인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일본의 이시바 총리는 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APEC 참석을 거의 확정지었다. 또 중국의 시 주석에게는 우 의장이 열병식 행사 현장에서 APEC 참석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향후 이재명 정부의 촉각은 한반도 태풍의 핵인 ‘김정은의 결단’에 쏠릴 전망이다. 참석과 불참, 모두 중요한 의사 선택이 될 것이다. 이 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국익 우선이라는 대원칙 아래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국제 환경 변화 속에 전략적이면서도 창의적인 길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반도의 운명을 다른 남자들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