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엄습한 ‘제조업 공동화’ 위기…反기업법 대신 규제 혁신으로 관세전쟁 대응해야”
[인터뷰]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미 회담 방향은 맞지만 비용은 난관” “협상 전략 바꾼 美, 안보·통상 ‘패키지 딜’ 대신 ‘쪼개기’…한국에 더 큰 양보 요구” “‘북한의 비핵화’ 꿈에서 깨어나야…김정은-시진핑-푸틴 회동은 이벤트성 만남”
‘첫 상견례는 잘 마쳤지만 본게임은 지금부터.’ 한미 정상회담에 촉각을 곤두세워온 외교가에선 대체로 이러한 총평이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의 ‘친중·반미’ 성향에 대한 의구심을 불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합의문이 없는 등 안보·통상을 둘러싼 양국의 후속 실무협상은 첩첩산중이라는 현실이 드러났다는 평가다.
국제통으로 꼽히는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9월2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재명 정부가 안보 협상과 관세 협상 후속 조치에서 취해야 할 전략과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불확실성과 압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한국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전략적 마지노선’을 세워 과도한 경제적 부담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동시에 반기업적 법안 대신 국내 투자를 유인할 수 있는 ‘규제 혁신’으로 ‘제조업 공동화’ 등 예상되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협상 전략이 미묘하게 바뀐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이 안보·통상 문제를 한데 묶지 않고 쪼개는 전략으로 한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음을 짚었다. 안보와 통상 각 사안별로 협상의 레버리지를 유지하면서 한국 측에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는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상대의 전략을 면밀히 읽어내야 대비와 대안 마련이 가능하다. 그는 북핵 문제 해결과 관련해서는 “북이 비핵화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진 이들이 꿈에서 깨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과의 군사동맹 의존도가 높지만, 변화하고 있는 국제 질서와 환경 속에서 이번 회담을 계기로 핵 잠재력을 확보해 필요시 우리의 안보와 국제 질서의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자강의 길로 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총평은.
“회담 전에는 ‘방향과 비용’ 차원 모두에서 우려가 컸는데, 방향성에 대한 걱정은 불식시켰고 비용의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우선 한미 간 경제·외교 관계의 방향성은 잘 설정했다. 미·중 패권경쟁에서 미국의 손을 들어주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면서 ‘친중·반미’ 성향에 대한 미국의 불신을 해소한 점도 성공적이다. 하지만 한미 관세협상에 따른 관세와 대미 투자비용이 너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히 남아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관세 협상에서 가진 카드가 별로 없을뿐더러 미국이 문서 작업 없이 강압 전략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비용의 불확실성은 해소하지 못했다.”
합의문 없는 협상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합의문이었을 텐데, 미국은 협상 카드를 유지하기 위해 문서 작업을 피하고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관세율이나 다른 사안들을 계속 바꾸고, 물리고, 엎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시장경제에서 잔뼈가 굵은 트럼프 스스로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지속할 순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건 미국 기업들의 불확실성도 높이기 때문에 좋지 않다. 미국 경제가 안정기에 올라탔다는 신호가 보이면 트럼프도 협상을 문서화하거나 확실성을 높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그 시기다. 미국은 현재 사상 최대의 부채 위기를 맞은 상태다. 인플레이션이 올 것이라는 불안감도 엄청나다. 사실상 국제통화기금(IMF) 구조조정을 받아야 할 수준의 국가부채에 허덕이고 있는데, 구제 금융 대신 관세전쟁을 통해 전 세계로부터 막대한 자금과 투자를 끌어들여 버티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협상 전략은 어떻게 보고 있나.
“전형적인 ‘분리와 연계’ 압박이라는 협상 전략을 보이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이다. 한국과 일본의 담합을 막기 위해 두 국가를 분리한 것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안보와 통상을 분리할 것이라고는 대부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패키지로 처리할 것으로 봤고 그래서 우리도 ‘패키지 딜’ 전략을 준비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왜 노선을 바꿨을까. 여기에는 미국이 안보와 통상을 분리해 양쪽 모두에서 협상 레버리지를 가져가는 동시에, 두 사안을 연계해 한국이 더 많이 양보하도록 압박하려는 의도가 담겼다고 본다.”
한국의 ‘패키지 딜’ 전략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미국이 두 사안을 분리한 것은 우리에겐 아주 골칫거리다. 한국이 미국의 안보 요구를 안 들어주면 통상 사안에서 합의한 내용을 다시 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이 방위비 분담금이나 국방비 인상, 전략적 유연성 등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관세 협상 품목에서 압박을 가할 수 있다. 안보에서 얻어낼 것을 확실히 정하고, 그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통상에서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압박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
“‘한미 관계와 한·미·일 협력’ 두 가지 틀로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한미 관계에선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 요구를 어느 정도 받으면서 관세 협상 내용을 구체화해야 한다. 주의할 점은 한국 경제가 버틸 수 없는 수준의 방위비나 대미 투자 요구를 수용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미국의 국가부채 비율이 심각하더라도 한국이 무리한 경제적 부담을 하는 건 옳지 않다. 동맹국이어도 ‘선’은 지켜야 한다. 두 번째는 한·미·일 협력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군사·방위 협력에만 치중하지 말고 외교, 경제, 기술, 민간 교류 등 전방위적으로 한·미·일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3국 사무국을 차리는 것도 협력의 제도화를 위한 좋은 시작이다.”
후속 조치가 관건이라는 분석이 많다.
“국민 입장에선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 셋째도 경제다. 관세 협상에서 우리가 내밀 카드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트럼프가 요구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와 1000억 달러 상당의 미국산 에너지 구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이럴수록 정부는 미국에 투자하는 만큼 국내 및 해외 투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 기업들에 대한 규제를 풀어주고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관세 후속 조치를 평가한다면.
“정부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관세 협상에 따라 미국한테는 퍼주면서 국내에서는 노란봉투법이나 더 센 상법 개정안 등 기업을 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드는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장기적으로 반도체, 철강, 조선, 자동차 등 한국 핵심 산업의 좋은 일자리는 모두 미국으로 빠져나가고 한국의 제조업이 공동화되는 상황이 닥칠 수 있다.”
안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은.
“중요한(significant) 사안과 시급한(urgent) 사안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전략적 유연성, 방위비 분담금, 주한미군 역할 조정,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등 수많은 사안의 경중과 시급성에 따라 대응해야 한다. 예컨대 전작권 전환은 중요하지만 다른 사안에서 더 많이 내줄 협상 카드로 쓸 만큼 급한 의제는 아니다. 반면 전략적 유연성은 그보다는 시급한 의제이고, 미국의 요구를 일정 수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가령 대만 사태가 발생하면 미군의 전략상 주한미군 기지를 제공하는 한국이 개입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이 일어나는데 중국을 의식해 개입을 망설인다면 그 자체로 국제사회에서 왕따가 될 수도 있다.”
일본 수준의 우라늄 농축·재처리 허용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은 ‘시급한’ 사안이다. 핵 잠재력을 가급적 빨리 확보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북한, 중국, 러시아가 모두 핵을 갖고 있는데 동아시아의 민주주의 국가 중 핵이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그 격차를 해소하는 국가가 돼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정부가 이번 한미 회담을 계기로 우라늄 농축·재처리 측면에서 우리가 더 많은 여지를 갖는 쪽으로 미국과 협의한 것은 높게 평가한다.”
핵 잠재력 확보에 미국은 회의적일 텐데.
“서로 윈윈(win-win)이 되도록 협상해야 한다. 우리가 내밀 수 있는 카드는 ‘비대칭 전력’이다. 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을 갖고 한반도 방위의 한국화를 요구할 경우, 북한은 핵이 있고 한국은 핵이 없는 비대칭 상황에 처한다. 이런 상황을 전제로 핵 잠재력 확보까지는 허용해 달라고 설득할 수 있다. 한국에 핵 잠재력을 허용하는 대신 북한에 대한 방위는 한국이 직접 책임지고 미국은 대중 견제에 더 집중하도록 합의하면 한국과 미국에 서로 윈윈의 합의가 된다.”
북핵 문제 관련 외교안보 좌표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북한이 비핵화할 것이라는 희망을 아직 갖고 계신 분들은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제로(0)’에 수렴한다. 북한을 통해 한국 경제를 더 살리고 중국과 러시아 대륙으로 진출할 통로를 뚫어 엄청난 교역을 이뤄낼 수 있다는 막연한 착각과 환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외교·안보도 결국 한정된 자원 속에서 기회비용이 존재한다. 안 되는 길에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을 순 없다.”
올해 APEC에서 이재명-김정은-트럼프 회담 가능성은.
“김정은이 그 자리에 나올 확률 역시 ‘0%’에 가깝다. 북한은 이미 중국과 러시아 관계에서 충분한 카드를 확보하고 있는데 굳이 한국에서 미국과 함께 만날 이유가 없다. 트럼프가 확실히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고 핵 군축 협상을 할 의지가 있다는 제스처를 보이지 않는 이상, 김정은이 회담에 응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다만 김정은과 트럼프의 단순 ‘사진 찍는 만남’은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 트럼프는 북한과 러시아처럼 ‘현상(자유민주주의 질서) 변경 세력’들을 억지하면서도 그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적과도 핫라인을 열어두고 관리하는 것이 트럼프의 스타일이다.”
시진핑-김정은-푸틴 전승절 회동이 주는 메시지는.
“우리의 러브콜에 북한은 확실한 거절 의사를 보냈다. 남한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전달됐다. 상당 기간 남북관계가 다시 복원되지 않을 수 있는 시점 역시 다가왔다. 북한이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하거나 경제 제재 해제 협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의미도 담겼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처럼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지만 북한에 핵을 포기하라고 압박하지 않을뿐더러 북한도 두 국가를 통해 경제, 안보 모든 것을 취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북·중·러 질서가 확립되는 역사적 순간으로 봐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미국 패권에 대응하기 위한 ‘북·중·러 질서 확립’의 자리는 아니다. 굉장히 방어적이고 보여주기식 만남에 불과하다. 공교롭게도 외부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이 침투하면 정권이 불안해지는 나라들끼리 모였는데, 이들이 질서를 만드는 역사적인 장면을 원했다면 다양한 협정을 맺고 제도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없다. 따라서 방어적인 연대의 결속을 보여주려는 이벤트성 회동이라고 본다.”
한국 정부는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노선에서 벗어나겠다고 했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압박이 커질 수 있다. 안미경중에서 벗어나는 데 따르는 전환 비용, 우리가 앞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용 등이 발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외교도 결국 모두 기회비용이기 때문에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말도 그런 의미다. 이럴 때일수록 정치권에서도 통합적인 메시지가 나와야 하는데 ‘중국엔 셰셰, 미국엔 땡큐’ 같은 표현만 반복되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 외교안보팀이 정무적 판단과 실무적 판단을 잘 합쳐 파고를 헤쳐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