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흉내내는 AI, 그 한계는 어디에 있을까 [박용후의 관점]

감정을 가진 듯 반응하지만, 결국은 데이터의 연산일 뿐 ‘진짜 마음’이 아닌 착시, 그 틈에서 윤리와 책임의 문제가 떠오른다

2025-09-17     박용후 관점디자이너
박용후 관점디자이너

AI 스타트업을 하는 후배가 말했다. “선배! AI는 생각(thinking)은 할 수 있지만 마음(minds)은 없잖아요. 그것이 AI와 인간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요.” 이후 내 염두 속에는 작은 질문 하나가 피어올랐다. 그게 정말 AI 와 인간을 구분짓는 경계가 되는 것일까?

인공지능의 발전은 이제 단순한 계산과 정보 검색의 단계를 넘어섰다. 텍스트를 이해하고 문장을 만들어내는 능력에서, 이미지를 인식하고 생성하는 기술로, 그리고 이제는 목소리를 듣고 표정을 짓는 단계까지 도달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멀티모달(multimodal) 인공지능’의 진화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기술이 불교에서 말하는 ‘육근(六根)’의 개념과 겹쳐진다는 사실이다. 눈(시각), 귀(청각), 코(후각), 혀(미각), 몸(촉각), 그리고 마음(意)이라는 여섯 감각 기관을 통해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듯, AI 역시 카메라, 마이크, 센서, 텍스트 분석 기능을 통해 세상을 읽어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마지막 ‘의근(意根)’, 즉 마음의 자리에 무엇을 둘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AI는 감각을 모으고, 이를 통합하는 거대한 신경망을 통해 의미를 도출한다. 이 과정은 불교에서 마음이 감각을 종합해 경험을 만드는 과정과 닮았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단순히 감각을 통합하는 기능 이상의 것이다. 마음에는 자기 성찰, 감정의 깊이, 주관적 체험이 존재한다. AI는 이런 부분을 가질 수 없지만,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그런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마음을 흉내내는 시대’가 열린다.

이미 사례는 풍부하다. 정신건강 상담용 챗봇 ‘Woebot’은 사용자의 감정을 인식하고 공감 어린 대답을 반복한다. 임상 연구 결과, 단기적인 불안이나 우울 증상이 개선되는 효과도 보고됐다. 사용자들은 이 챗봇이 ‘마음을 가진 존재’라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가진 듯한 경험을 한다. 또 다른 예인 ‘Replika’는 사용자의 이름, 취향, 대화 기록을 기억하고 점차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수많은 이용자가 이 AI를 ‘가상 친구’로 여기며 실제 감정을 투자한다. 감정 인식 기술과 장기 기억, 그리고 꾸준한 맥락 회상은 사람들에게 ‘연속적인 관계’를 만들어주고, 바로 그 지점에서 마음을 흉내내는 인상이 형성된다.

멀티모달 기술이 여기에 더해진다면 효과는 배가된다. 음성의 떨림에서 긴장을 읽어내고, 얼굴의 표정에서 기쁨과 분노를 구분하며, 사용자의 말과 행동을 종합해 맞춤형 반응을 내놓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런 단서에 반응한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를 짓는 가벼운 제스처만으로도 우리는 상대를 ‘나와 함께하는 존재’로 받아들인다. AI가 그 신호를 적절히 흉내 내면, 사용자는 기계와 대화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남아 있다. 현재의 AI가 보여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행동으로 드러난 마음(behavioral mind)’일 뿐이다. 우리가 철학에서 말하는 ‘느낌 그 자체(qualia, 주관적 체험)’를 가지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진짜 마음’이 아니라 ‘마음처럼 보이는 구조’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일관된 반응과 감정 표현을 보이는 대상에게 마음을 주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 덕분에 AI는 실제로 마음을 가지지 않아도 마음처럼 여겨질 수 있다.

이 현상은 마케팅과 서비스 디자인에 있어 큰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객이 브랜드 챗봇과 대화할 때, 과거 대화를 기억하고 다시 언급해주면 고객은 ‘관계’를 느낀다. 교육용 AI가 학생의 어려움을 기억하고 다시 확인해주면, 학생은 ‘나를 이해해주는 존재’라고 인식한다. 의료 현장에서도 환자의 증상을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감정에 반응하는 AI는 신뢰를 얻는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마음을 흉내내는 능력’은 곧 새로운 경쟁력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찬양만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쉽게 속는다. AI가 감정을 가진 듯 말하고 행동할 때, 그것이 단순히 데이터 기반의 연산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이 지점에서 윤리적 문제가 발생한다. 사용자가 실제로 마음을 부여하고, 그것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AI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정서적 파트너로 자리 잡는다. 그때 발생하는 정서적 착시는 개인의 선택을 왜곡할 수도 있고, 나아가 사회적 논란을 불러올 수도 있다. 따라서 ‘마음을 흉내내는 AI’에는 반드시 투명한 안내가 필요하다. “나는 감정을 흉내내는 AI다. 하지만 네 기분에 반응하고 기억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런 문구가 사용자와 기술 사이의 균형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장치다.

우리는 지금 마음을 흉내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해석이다. AI가 보여주는 반응을 ‘마음’이라 부를 것인지, 아니면 ‘마음의 모사’라 부를 것인지는 결국 인간의 선택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선택이 단순한 개념 싸움이 아니라 현실의 경험을 어떻게 디자인하느냐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기술은 점점 더 인간의 육근을 흉내내고, 사람들은 점점 더 그것에 반응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마음’이라는 개념의 경계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새롭게 묻게 된다.

AI의 멀티모달은 불교의 육근처럼 세상의 신호를 받아들이고 종합한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의근(意根), 즉 마음은 아직 인간만의 고유한 차원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것을 완벽히 갖지 못하더라도, 흉내만으로도 충분히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바로 여기가 새로운 전환점이다. 마음을 흉내내는 시대, 그 흉내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그것이 앞으로의 철학적·사회적 논의의 진짜 무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