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시간 고난 길에도 ‘서울 빅5’ 병원 찾는 암 환자들 “지방 병원은 못 믿어요” [시사저널 연중기획│지방소멸에 산소호흡기를 ⑨]
“의사가 없다” vs “환자가 없다”…‘빅5 쏠림’의 딜레마 ‘지방→서울’ 사회적 비용 매년 4조 넘어…‘지역 거점 국립대병원’ 투자 늘려야 지역 의사들 “떠나는 환자 막을 길 없어…‘공공의대’보단 ‘지방에 살 의사’ 필요”
대한민국이 저성장·저출생의 늪에 빠졌습니다. 인구 소멸은 곧 지방소멸을 뜻하며,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는 날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의료도, 주거도, 육아도 빠진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청년이 떠나고 노인만 남는 현실이 고착되고 있습니다. 소멸과 집중의 속도를 늦추고 균형을 회복하는 일은 지금 우리 사회가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이는 지역균형발전을 약속한 이재명 정부의 시급한 시험대이기도 합니다. 시사저널은 2025년 말까지 지방소멸과 수도권 집중의 현장, 쟁점, 대안을 심층 추적하는 연중기획을 준비했습니다. 특히 각 지역 독자 여러분의 생생한 제보를 바탕으로 삶의 현장을 밀착 취재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그 문제죠.” 한평생을 지역 거점 국립대병원에서 일한 한 교수는 지역의료 시스템이 붕괴된 원인에 대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방에 환자가 있으면 의사도 남고, 의사가 지방에 남으면 환자도 생긴다’는 의미다. 하지만 지방소멸과 의료계 필수·지역의료 기피 현상 등 복합적 문제가 겹겹이 쌓이면서 의료 서비스 공급(의사)과 수요(환자)의 격차는 급속도로 벌어졌다. 환자들은 더 많은 의사가 있고 더 전문적인 기술을 갖춘 서울의 큰 병원, 그중에서도 5대 대형병원인 이른바 빅5(서울아산·서울대·삼성서울·세브란스·서울성모병원)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전공의 집단 이탈로 인한 지역의 의료 공백 사태로 ‘서울 쏠림’ 현상은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몰리면서 ‘뉴노멀’로 불리는 실정이다.
이 딜레마를 끊기 위해서는 시스템을 다시 세우는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환자와 의료계 양측의 공통된 요구다. ‘생명과 직결된 의료 서비스’, 이른바 필수의료를 지역과 관계없이 모든 국민이 형평성 있게 제공받을 수 있도록 추계·인프라·수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윤석열 정부는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는 ‘공급의 양적 확대’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늘어난 의사가 필수·지역의료에 몰리도록 해서 낙수효과를 내자는 취지였다. 그 부작용은 현재까지도 다 돌아오지 않는 사직 전공의들을 통해 체감하게 됐다. 의료계는 이재명 정부가 대안으로 제시한 공공의대, 지역의사제에 대해서도 정부가 여전히 양적 확대 해법에만 국한돼 있다며 아쉬움을 전한다.
의사가 늘어난다고 의료 불균형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의료 정책은 지방의 삶의 질, 의사의 정주성, 중앙정부가 쥐고 있는 지역의료 체계의 구조적 한계, 나아가 지방소멸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논하지 않고서는 원인 진단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정부 정책을 못 따르겠다며 환자를 등지는 의료계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전공의 이탈 사태가 발생한 지 2년이 되어가는 지금, 환자와 의료계, 정부의 현주소를 확인해 봤다. 그 과정에서 환자는 인내심을, 의료계는 책임감을, 그리고 정부는 전문성을 갖춰야 할 때가 됐다는 각계각층의 씁쓸함이 전해졌다.
“목숨 걸린 암 수술, 서울 명의한테 맡길래요”
“지방 병원 의료기기는 서울보다 10~20년 정도 뒤처진대요.” 9월16일 오전 10시, 서울 수서역 앞 버스정류장. 60m가 넘는 긴 대기줄의 사람들 사이에선 이러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지방 곳곳에서 이곳에 도착한 이들은 주로 암 환자 등 중증 환자와 그 보호자들이었다. 고속열차에서 내린 뒤 이곳에서 삼성서울병원, 강남세브란스병원, 서울아산병원에 데려다줄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8~10분 간격으로 정류장을 드나드는 셔틀버스는 이들을 차례대로 태워 출발했다. 그렇게 줄이 조금씩 줄어드는가 싶다가도 역에서 새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계속 합류했다.
이들이 서울을 찾는 이유는 일맥상통했다. 지역 병원에서는 받을 수 없는 ‘고난도’ 수술과 지방에선 만날 수 없는 ‘국내 최고’ 의사를 보러 서울로 왔다고 한다. 짧게는 왕복 3시간, 길게는 5시간 반 넘게 고속열차 안에서 하루를 보내는 이들은 꼭두새벽부터 집을 나서 수서역에 도착했다.
삼성서울병원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은 40대 이수연씨(가명)는 이날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해 고향인 경북에서 새벽 6시에 출발했다. 한 번 진료를 받으러 올 때마다 병원 예약, 고속열차 예약, 직장 연차 일정도 일찍이 조율해 놔야 했다. 그 과정 끝에 병원에 도착해도 담당 의사를 만나기까지는 다시 기다림의 연속이다. 이날 이씨는 긴 대기·이동 시간을 감안해 짐을 최소화하고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피검사, 초음파·심전도 검사가 끝나면 5~10분 정도 의사 소견을 듣고 약을 받은 뒤 다시 열차에 올라탄다. 집엔 밤 7시쯤 도착한다.
이씨는 13시간 넘는 이 ‘고난의 길’을 4년 동안 반복했다. 그는 “우리 암 환자들은 생명을 담보로 수술을 받기 때문에 당연히 국내 최고의 의사를 찾아야겠다는 절실한 심정이 들어요. 그런 분들은 서울에 다 몰려있더라고요”라고 전했다.
같은 대기줄에서 30분 넘게 셔틀버스를 기다리던 78세 김숙자씨(여·가명)는 20여 년 전부터 삼성서울병원을 다녔다. 대구의 한 병원에서 처음으로 담낭암 진단을 받은 그는 당시 의사가 한 말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보고 암인 것 같다는데 ‘여기선 수술이 안 된다, 서울로 가야 한다’ 캐가, 그때부터 여로 왔지”라고 회상했다. 암 진단을 받은 김씨의 절망감이 가닿은 것이었을까. 서울을 찾은 김씨는 국내 소화기외과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한 교수에게 담낭암 수술을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건강 상태에 따라 6개월에 한 번, 때로는 3개월에 한 번씩 남편의 손을 잡고 서울로 정기 검진을 받으러 왔다.
해마다 수도권과 지방 간 의료 격차 속에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은 4조원이 넘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올해 6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립대병원 대신 서울 상급종합병원을 이용함에 따라 추가로 드는 비용은 연간 최대 4조6270억원으로 추산됐다. 숙박비와 교통비만 합해도 4121억원, 병원 간 진료비 차이를 고려한 비용은 1조3416억원이다. 여기에 환자 및 가족의 기회비용 총 2조8733억원까지 추가됐다.
지역 환자들은 ‘치료해줄’ 의사가 없으니 서울로 간다고 말한다. 지역 국립대병원 개선에 대한 국민인식 설문조사 결과(한국보건사회연구원)를 보면, 전문 의료인력 확보가 필요하다는 응답률이 81%에 달했다. 이 외에도 응급질환·중증질환 관련 역량 고도화, 필수진료과 확충, 병원 및 시설 장비 개선 등의 필요성이 80%대 안팎으로 높았다. ‘질병 특성별 국민의 최우선 선호 의료기관’ 조사에선 중증 질환자(36.5%)와 상세불명 질환자(36.6%)가 가장 선호하는 병원은 수도권 상급종합병원이었다. 지역 국립대병원의 경우 응급환자의 선호도가 37%로 높았고, 나머지는 10~20%대에 그쳤다.
“의사 무한공급만으론 의료 붕괴 못 막아”
반면 의사들은 ‘치료할’ 환자가 없으니 서울로 간다고 말한다. 충북대병원 출신 한 교수는 기자에게 “제 앞에 찾아온 환자가 ‘서울 큰 병원에 가게 진단서를 내달라’고 말하면 저희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며 “저희 병원에서 수술이 가능한 환자여도 그분의 선택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앞선 설문조사 결과와 수서역의 환자들이 전했듯 ‘우리 지역 병원에 내 목숨을 맡길 수 있을까’라는 불신이 해소되지 않는 이상, 딜레마를 끊을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의료계에선 이런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지역 완결형’ 의료전달체계를 개편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려면 지역 거점 국립대병원의 역할부터 강화해야 하는데 현재로선 시설·장비 등 병원에 대한 제한된 투자, 낮은 인건비, 의료인력 부족 등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지역의 2차 종합병원도 만성적인 전문 의료인력 공급 부족 문제에 직면하면서 상대적으로 중증 환자를 진료할 능력도 떨어지는 상황이다. 그렇다 보니 지역 병원에서는 일종의 ‘공동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1차 의료기관→대형 2차 병원→상급종합병원’ 구조로 이뤄진 지역 의료전달체계의 대부분 단계가 사실상 붕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첩첩산중으로, 중앙정부가 지역의료 정책을 주도하다 보니 지자체의 자율성과 집행 체계도 무너졌다. 정부의 의료정책 역시 수도권 상황을 지역에 획일적으로 적용하면서 정책의 효율성과 탄력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에 윤경철 전남대병원 진료부원장은 “권역 필수의료 네트워크 강화를 위해 국립대병원을 ‘컨트롤타워’로 세우고, 의뢰와 회송, 당직, 역전원 등의 과정을 표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재정 프레임도 전환할 필요가 있다”며 “건강보험, 국고와는 별개로 지역 및 필수의료에 대한 별도 재정을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지역 맞춤형 정책의 첫 단추로는 ‘정주 여건’ 개선이 꼽힌다. 전문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 지역 의사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지역에 정주할 수 있는 인센티브, 다양한 고용계약을 허용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의료계는 입을 모은다. 민간병원의 공공의료 역할도 거론됐다. 신경철 영남대 호흡기·알레르기내과 교수는 “보건소, 지방 의료원, 지역 국립대병원 중심으로 돌아가는 공공의료체계는 지역·필수·공공의료를 모두 감당하기에는 현장의 어려움을 반영하는 속도가 늦고, 의사결정 과정과 운영의 비효율성도 크다”며 “중환자 병상 확대, 응급의료 강화 등 민간병원의 공공의료 참여 확대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정부가 지역의료 정책으로 내세운 ‘공공의대’에 대해선 비판론이 지배적이다. 김유일 대한의학회 정책이사는 “공공의대 신설과 교육 병원 마련 비용이 만만치 않다”며 “국회예산정책처 자료에 따르면 1개 의대 설립에 약 20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한데 이는 작년 국립의대 평균 연간 등록금 800만원을 2만5000명에게 지원해줄 수 있는 돈”이라고 지적했다.
김 이사는 차라리 기존 의대를 이용해 바로 시행할 수 있는 ‘지역의사전형’이 더 실용적일 수 있다고도 짚으면서 “의무복무 기한을 잘 지키고 지역 필수의료를 택할 수 있도록 지역의 환경적 요인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고 했다. 지역의사전형은 의대 입시에서 일정 기간 지역 필수의료 종사를 조건으로 선발하는 전형이다.
정부가 아무리 공공병원과 공공의대를 신설해 지역 공공의료 ‘공급’ 확대를 추진하더라도 지역에 남겠다는 의사가 없으면 백약이 무효한 셈이다. 지역 환자들이 서울로 향하는 ‘수요’ 측면에 대한 대책이 없다면 의료인력 무한공급으로는 지역의료가 해결될 수 없다는 회의적 시각도 있다. 배장환 좋은삼선병원 순환기내과 교수는 “정부는 백화점식으로 의료 문제점을 나열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장·단기 정책을 구분하고 무엇이 정말 우선순위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며 “바라건대 차근차근 정책을 추진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