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시론] 이 대통령의 황당한 ‘권력서열론’
9월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이재명이 이른바 ‘권력서열론’을 내세우면서 삼권분립에 정면 도전하고 나서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는 “대한민국에는 권력의 서열이 분명히 있다. 최고 권력은 국민·국민주권, 그리고 직접 선출 권력, 간접 선출 권력”이라고 했다. 이어 “국회는 가장 직접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았고, 국가 시스템을 설계하는 건 입법부 권한”이라며 “사법부는 입법부가 설정한 구조 속에서 헌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고, 사법부 구조는 사법부가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고 했다.
국회 내 다수당인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입법을 하는 건 사법부 권한 침해가 아니라 정당한 권한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삼권분립과 같은 서양의 정치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국내 학자들의 창의성 부재를 개탄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이나 되는 것처럼 단언한 대통령의 무모함을 탓해야 하는가?
사실 내가 놀란 건 이 발언 내용과 더불어 확신과 자신감에 넘치는 그의 어법과 표정이었다. 순간 “윤석열의 죄가 정말 크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언젠가 “민주당 인사들은 윤석열이 저지른 죄악이 자신들을 백설처럼 순결하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한다는 신앙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수정해야겠다. 그들은 윤석열 덕분에 ‘백설 같은 순결’을 넘어 ‘전지전능한 지식·지혜’마저 갖게 되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오만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선의의 해석도 하고 싶다. 이재명이 자신의 오늘을 만들어준 팬덤에 너무 심취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건 아닐까? 그에게 팬덤은 권력의 원천이었으며, 정치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그런 팬덤정치에 맞게끔 민주주의 이론마저 재구성하게 된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재명이 ‘팬덤의, 팬덤에 의한, 팬덤을 위한’ 팬덤민주주의로 기울게 된 것은 이렇다 할 자원이 없는 처지에서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이재명의 멘토 역할을 자청한 서울대 명예교수 백낙청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2022년 3월 이렇게 말했다. “권리당원들이 훨씬 더 많이 (민주당에) 들어가서 그분들이 이재명 당대표를 요구하면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러면 이재명씨는 처음으로 민주당이라는 곳을 장악해서 해볼 기회도 생기는 것이고….”
이재명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SNS 대통령’인 동시에 ‘유튜브 대통령’이었다. ‘좌표찍기’에서부터 ‘슈퍼챗’ 요청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재다능했다. 민주당 내 이재명 비판자들에겐 지지자들의 보복이 잔인하게 이루어져 “극단적 종교집단이나 모택동 홍위병과 무엇이 다르냐”고 비명을 지르는 의원마저 나올 정도였다.
이재명은 2022년 2월에도 ‘선출권력 우위론’으로 논란을 빚은 바 있는데, 선출권력과 임명권력의 가장 큰 차이는 팬덤정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바로 이 차이가 이재명이 선출권력 우위를 주장하게 된 최대 근거는 아니었을까?
이재명이 민주당의 아웃사이더 위치에서 단기간에 민주당을 ‘이재명의 민주당’으로 만들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공포의 팬덤’ 덕분이 아니었던가. 그는 수년 전 “나는 침대 위에서 SNS를 보다가 굴러떨어지기도 할 정도로 많이 본다”는 말을 했다는데, 그의 ‘권력서열론’이 개인적인 중노동의 결과로 탄생한 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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