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독점 기조’로 日 제쳤던 美, ‘독과점 체제’ 택하니 中에 따라잡혀 [최준영의 글로벌 워치]

고통스럽지만 ‘혁신’ 낳은 ‘독점 타파’…‘무한 경쟁’이 효율성 개선 ‘관세’와 ‘장벽’이라는 편안한 길 택한 2025년 미국 정치권·유권자들의 딜레마

2025-10-19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의 변화는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규칙과 제도에 기반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이미지는 매우 취약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언론의 자유와 의회 및 사법부를 통한 행정부 견제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다양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던 미국이 순식간에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로 변화하고 있다. ‘미국의 중국화’라는 표현이 실감 나는 2025년이다. 차라리 중국이 더 예측 가능하고 신중하다는 평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유무역을 거부하는 미국과 다자주의 수호신을 자처하는 중국의 대결 구도는 낯설기만 하다. 

급격한 미국의 변화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15년 넘게 지속되었던 진보 우위의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발이라는 분석부터 제국의 쇠퇴라는 순환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중국의 추격과 급부상에 대한 미국의 초조함이 급작스러운 변화의 기저에 깔려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중국에 추월당한다는 두려움, 미국이 쇠퇴하고 있다는 공포감은 무너지기 전에 무엇이든 해봐야 한다는 ‘절박감’을 만들어냈다. 이런 절박감은 제조업 기반이 붕괴되고 지속적인 축소와 몰락을 경험해 왔던 지역에서 두드러진다. 공포감과 초조함 그리고 상대에 대한 증오가 넘쳐나고 있다. 

9월30일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 해병대 기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고위 군 지휘관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AFP 연합

플라자 합의와 인터넷 확장도 변곡점 역할

1980년대 미국도 유사했다. 높은 생산성과 효율성 그리고 기술적 혁신으로 무장한 일제 상품들은 미국 시장을 무차별적으로 잠식했다. 과거에 혁신과 압도적 생산성을 자랑하던 미국 기업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컴퓨터 메모리 산업을 만들어냈던 인텔은 D램 시장에서 철수했고 미국의 상징이던 GM은 매년 수십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일본이 미국을 장악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체념은 당시 출간된 《Japan as Number 1》이라는 책에 잘 드러나 있다. 미국은 일본의 수출을 막기 위해 관세 부과, 품목별 물량 제한 등의 조치를 했고 미국 기업에 대한 대출 및 세제 혜택 등 지원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당시 일본의 경쟁력은 국가와 기업의 ‘일사불란함’에 의한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지속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해외 지식 및 노하우를 소개하고 습득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기업들은 이런 국가의 지원을 통해 급성장했다. 일본 정부는 해외 기업들의 일본 진출을 통제했으며, 진입을 허가하는 대신 기술을 제공하도록 요구했다. IBM을 비롯한 미국 전자 업계는 일본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그 결과는 일본 전자산업의 급성장이었다. 일본 제조업은 노동자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켰으며, 일본 경영진들은 유연한 생산방식과 재고 부담 없는 적시 납품 등 기업 경영혁신 모델을 통해 수익률을 높였다. 계열사로 조직화된 선단식 경영은 긴밀한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199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은 일본을 제치고 다시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세계 최고 국가라는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플라자 합의로 알려진 환율 정책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미국의 생산성 개선이 양국 간 역전을 이끌어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좀 더 깊은 변화가 있었다. 미국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강력한 ‘반독점 정책’을 지속했다. 특정 기업이 독점 및 과점 구도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미국 행정부와 사법부는 기업분할 등 다양한 수단을 활용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통합 기업이던 IBM은 소프트웨어 부문을 분사했고, 독점적 통신업체였던 AT&T는 10개가 넘는 회사로 분할됐다. 강력한 경쟁자에 맞서 더 크고 단일한 기업이 필요할 것 같은 상황에서 미국은 반대의 길을 걸었다. 1945년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미국은 200건이 넘는 소송과 기소를 통해 반독점 기조를 이어왔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새로운 혁신과 시도가 이어졌다. 다양한 기술과 표준이 경쟁하면서 효율성이 높아졌다. 생산비용 절감을 위해 제조업의 모듈화가 진행되었고 특정 기업이 아닌 산업 공통의 개방형 표준이 자리 잡았다. 모듈화된 공정은 글로벌한 공급망 구축을 가능하게 했고 미국 기업들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을 활용하면서 비용을 낮췄다. 거대한 미국 자본시장은 새로운 산업과 기업에 충분한 자본을 공급하면서 경쟁력을 갖추도록 해줬다. 인터넷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내부 협력에 특화된 계열사 모델을 유지하던 일본은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기 어려웠다. 일본 역시 미국의 영향으로 반독점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으나 실제 적용은 거의 없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미국의 움직임을 따라잡기에 일본의 거대 기업들은 너무 느렸다. 문제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바꾸기에는 일본 기업 내·외부 환경은 너무나 경직돼 있었다. 

7월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플로리다 오초피에 위치한 임시 이민자 구금 시설을 시찰한 후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합동기지에 도착하고 있다. ⓒREUTERS

시장 점령한 美 빅테크, 어느새 사라진 혁신

3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과거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후발주자의 유리함과 국가와 기업의 일사불란함을 통해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7000만 명이 넘는 산업 인력과 촘촘한 제조업 공급망은 중국을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제조업 국가로 성장시켰다. 중국 시장을 노린 수많은 다국적 기업에 중국 정부는 기술 제공, 중국 업체와의 합작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그 결과는 중국 제조업 역량의 급성장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양성된 중국의 능력 있는 제조업 인력들은 제조업 흐름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됐다. 고속철도, 태양광, 이차전지 등 각 분야에서 중국 산업 정책은 성공을 거두었고 중국은 양적 성장은 물론 질적 도약을 달성하면서 경제 체질을 전환했다. 

과거 일본과의 경쟁을 돌이켜보면 미국이 중국의 급성장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독과점 타파를 통한 체질 개선이다. 하지만 정작 미국의 모습은 반대다. 2000년대 들어 투자자 보호 및 기업 이익 확대를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잇따라 내놓았다. 이 과정에서 엄격했던 기업 결합 심사 및 독점 금지 원칙은 약화됐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거대 테크기업들은 수많은 기업을 인수합병하면서 지배적 플랫폼 기업으로 성장했다. 우리는 이것을 혁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결국 독과점 체제를 강화한 것이었다. 동일한 독과점 체제라면 국가와 기업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중국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와 특혜를 통해 자국 기업을 보호하는 것이 미국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안보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과거의 경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에 필요한 것은 고통스러운 혁신과 변화지만 미국 정치권과 유권자들은 관세와 장벽이라는 편해 보이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가치와 자유무역이라는 경제적 가치에 입각한 동맹은 미국의 변화로 인해 무너지고 있다. 미국은 과거의 교훈을 되살려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할 것인지, 아니면 정치와 금권이 결탁한 또 하나의 권위주의 국가로 변모할 것인지 기로에 서있다.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