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시론] 광해군의 몰락 미스터리, 열쇠는 김개시

2025-10-25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인조반정이 성공을 거두는 과정을 ‘광해군일기’와 ‘인조실록’을 통해 읽고 있으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당장 반정에 동원된 무장 세력이 1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제대로 무장도 갖추지 않은 오합지졸에 지휘부 또한 군사 경험이 없는 문신이 다수였다. 반면에 조정의 군대는 총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애당초 무력에서 양측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조정의 군대가 한순간에 패배하고 광해군은 담을 넘어 도망쳐야 했을까?

반정 세력은 그리 조직적이지도 치밀하지도 않았다. 여러 차례 역모와 관련된 첩보가 광해군에게 올라갔다. 그때마다 광해군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대궐 경비를 강화하라는 정도의 명을 내리는 데 그쳤다. 명민하면서도 의심이 많았던 광해군이기에 이 같은 재위 말년의 무방비 상태는 아주 특별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는 전적으로 김개시(金介屎)라는 상궁의 존재다. 흔히 ‘김개똥’으로 불린다. 김개시는 선조 때 광해군의 궁녀로 들어갔고 선조와 광해군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잘 중재해 훗날 광해군이 세자 자리를 굳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연히 광해군이 왕이 되자 말할 수 없는 총애를 받았다. 김개시는 처신에도 능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후궁이 될 수 있었지만 끝내 상궁에 머물렀다. 그리고 광해군 때의 최고 실력자 이이첨(李爾瞻)과 정치적 동지 관계를 맺었다. 이미 ‘광해군 일기’ 5년 8월11일자에 김개시와 관련된 비판이 실려있다.

“그의 지기(志氣)와 언론(言論)은 이이첨과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니 항상 의분에 북받쳐 역적을 토벌하는 것으로 자임한 것이, 비슷한 첫째이다. 그리고 상궁이 되어서도 호를 올려 달라고 요구하지 않은 채 편의대로 출입하면서 밖으로 겸손을 보인 것과, 이이첨이 항상 조정의 논의를 주도하면서도 이조판서나 영의정 자리에 거하지 아니하여 밖으로 염정(廉靜)을 보인 것이, 비슷한 둘째이다. 뜻을 굽혀 중전을 섬기면서도 내면의 실지에 있어서는 헐뜯은 것과, 이이첨이 저주하고 패역한 일들을 모두 스스로 했으면서도 남에게 밀어넘겨 도리어 토벌했다는 것으로 공을 내세운 것이, 비슷한 셋째이다.”

광해군의 눈과 귀를 조정에서 틀어막은 것이 이이첨이었다면 궐내에서 틀어막은 것이 김개시였다.

《논어》에는 딱 한 번 명(明)의 의미를 풀어내는 것이 있다. “물이 스며들 듯이 표시 나지 않게 동료를 중상모략하거나 살갗을 파고들 듯이 애절하게 사사로운 청탁을 하는 일이 행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임금의 밝은 정치이다.”

전자를 침윤지참(浸潤之讒), 후자를 부수지소(膚受之愬)라고 한다. 광해군은 이처럼 이이첨과 김개시에 의해 두 가지가 모두 행해지게 만들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이 암군(暗君)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잣대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지도자를 평가할 때 유효하다. 유감스럽게도 10여 명의 역대 대통령을 돌아볼 때 명군(明君)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김개시는 충성스럽지도 않았다. 대궐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윤선도(尹善道)가 여러 번 소를 올려 김개시를 멀리할 것을 주장했으나 도리어 자신이 유배를 가야 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전에도 역모의 조짐을 알리는 상소와 보고가 이어졌지만 그때마다 김개시가 “그럴 리 없다”며 광해군을 안심시켰고 그러면 광해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술자리를 이어갔다. 그리고 쫓겼고 김개시는 반정 직후 가장 먼저 처형되었다. 이런 광해군을 두고 외교의 천재 운운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 실록을 제대로 읽어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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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