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장기판, 갈 곳 잃은 어르신…탑골공원 논란이 불 지핀 ‘1천만 노인’ 문제
종로구, 주취 문제 등 이유로 탑골공원 내 장기판 철거 “가난하고 갈 데 없는 노인들 위한 대책 마련해 달라”
‘노인들의 성지’라 불렸던 탑골공원 안에서 장기판이 사라지면서 ‘갈 곳 없는 노인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장기·바둑 금지가 단순히 오락 한 가지를 금지한 것을 넘어 머물 곳 없는 가난한 노인들의 일상을 망가뜨린 것과 다름없다는 게 그 이유다. 이에 해당 지자체는 어르신들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조성하겠다며 진화에 나섰다.
“장기는 명분일 뿐, 사람들과 얘기나 나누려고 오는 건데…”
7월31일 서울 종로구청과 종로경찰서는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자 국가유산 사적인 탑골공원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원 내 장기·바둑 등 오락 행위와 흡연·음주가무 등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이는 종로구가 서울시와 함께 추진 중인 대규모 재개발사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해당 정책 시행에 대해 ‘탑골공원’의 상징과도 같던 ‘장기 두는 노인들’은 큰 불만을 드러냈다.
10월22일 시사저널 취재진이 찾아간 탑골공원에는 여전히 많은 노인이 있었지만, 이전처럼 장기나 바둑을 두며 한데 모여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이곳저곳에 흩어져 홀로 있는 노인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탑골공원 곳곳에 ‘탑골공원은 3·1 독립정신이 깃든 국가유산 사적입니다. 공원 내 관람 분위기를 저해하는 바둑·장기 등 오락행위, 흡연, 음주가무, 상거래 행위 등은 모두 금지됩니다. 위반 시 문화유산법 제101조에 의거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합니다’라고 적힌 안내문이 비치돼 있었다.
이 때문인지 시끌벅적하며 활기가 돌던 과거 탑골공원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웠다. 탑골공원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던 김태용씨(83)는 “종로구가 나선 뒤로 장기랑 바둑 두던 노인들이 탑골공원을 대부분 떠났다”며 “종묘공원에서는 아직 바둑과 장기를 두는 것이 가능해 그곳으로 갔다”고 했다.
일부 노인은 종로구가 장기판을 치운 이유를 이해는 한다면서도, 안 그래도 갈 곳 없는 노인들에게 과한 조치를 한 것 같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팔각정에 앉아있던 남아무개씨(77)는 “허구한 날 내기 바둑 두면서 시끄럽게 노름하던 노인네들 없어져 오히려 잘됐다 싶다”면서도 “그 사람들도 진짜 바둑이 좋아서 (탑골공원으로) 나온 건 아니다. 갈 데도 없고 적적해 사람 만나 이야기 나누려고 온 건데, 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또 탑골공원 인근 음식점에 있던 김아무개씨(80)는 “행패 부리던 사람들은 장기와 상관없는 노숙인이나 취객들이었는데 잘못도 없는 장기 두는 노인들이 피해를 봤다”며 “장기도 둘 겸, 이야기도 나누던 장소가 사라지니 노인들이 앉아서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해당 정책 시행에 대해 “종로구와 서울시가 우리 의견은 듣지도 않고 탑골공원의 장기판을 치워버렸다”며 불만을 표출하는 노인들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이후 공원 환경이 크게 개선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종로구는 정책 시행 후 내기·음주 장기, 노상방뇨 등으로 인한 112 신고가 37% 줄어드는 효과를 거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일부 노인은 여전히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수년째 일주일에 4일 이상 탑골공원을 방문하고 있다는 김아무개씨(88)는 “돈 없는 노인들이 와서 장기 좀 둔 게 그렇게 잘못됐냐”며 “아침에 눈 뜨면 마땅히 갈 데가 떠오르지 않아 늘 가던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장기는 그저 명분일 뿐 실은 사람들하고 대화하고자 했던 게 더 컸다”고 말했다.
“노인 건강과 정서적 측면에서 여가 공간 중요”
이뿐만 아니라 일각에서는 홍대 등 젊은이들 거리에서 벌어지는 음주가무 문제는 방치한 채 노인들 공간부터 정리하는 것은 차별이라는 지적이 나오며, 자칫 세대 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대응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와 종로구는 현재 탑골공원에서 약 200m 거리의 한 실내 문화공간에 장기판을 두는 방안을 협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체 공간이 확보되면 기존 탑골공원에 있던 12~15개의 두 배 수준인 장기판 24개를 배치한다는 계획이다.
정문헌 종로구청장은 “장기판이 사라진 후 112 신고 건수가 37%나 감소했다”면서도 “서울노인복지센터와의 협업을 통해 어르신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적극 지원해 나가겠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를 두고 탑골공원이 노인들이 편하게 즐기는 곳이자 서울을 대표하는 명물거리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정비했어야 한다며 문화에 대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인식이 부족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에 대해 종로구 관계자는 “올해 12월말까지 장기나 바둑을 둘 수 있는 실내 문화공간을 마련해 내년 1월께 개방할 예정”이라며 “이 외에도 어르신들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 등을 개설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종로구 측은 예고도 없이 장기판을 치운 것이 아니라 환경 개선을 위해 1년 가까운 계도 기간을 거쳤음에도 변화가 없어 부득이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당 관계자는 “(탑골공원에서) 장기나 바둑을 두는 어르신들이 공원 내에서 지속적으로 노상방뇨를 하시는 등 위생 문제가 있었다”며 “경복궁 담벼락에 낙서하는 것이 큰 문제인 것처럼, 같은 국가유산인 탑골공원이 오염되는 것도 막아야 하는 문제였다”고 토로했다.
통계청 발표를 보면 올해 9월 기준 국내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약 105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0.3%에 달한다. 대한민국 인구 5명 중 1명이 노인인 것이다. 이렇듯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노인 인구를 위한 다양한 여가 및 복지 시설을 그들의 수요에 맞게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여가 공간은 고립을 예방하고, 노인 건강과 정서적인 측면에 모두 중요하다”며 “그간 여러 차례 문제가 계속됐던 만큼 장기판 철거는 적절했다고 보지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분들을 위한 여가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한국 노인 빈곤율 40%…OECD 평균 14.2% 크게 웃돌아
또 일부 노인은 자신들이 공원으로 몰리는 이유가 ‘가난’ 때문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또 다른 노인들의 성지로 불리는 동묘에서 만난 이아무개씨(75)는 “동묘나 제기동, 탑골공원 정도를 오가며 지내고 있다”며 “그곳들 근처에는 무료 급식소가 많다. 그래서 우리같이 돈 없는 노인들이 몰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기자가 방문한 탑골공원 인근에서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곳 노인들은 매일 시간에 맞춰 방문해 번호표를 뽑아 급식을 기다린다면서 식사를 무료로 해결할 수 있어 좋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종로구청의 조치 이후 3개월 가까이 지났지만 탑골공원에는 이 같은 이유로 여전히 많은 노인이 몰린다. 탑골공원이 위치한 지하철 종로3가역의 지난달 전체 무임승차 및 무임하차 인원은 각각 46만8648명, 45만6667명이었다. 지난 6월에는 각각 45만9525명, 44만5710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 수에는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돈만 있다면 굳이 공원에서 무료 급식을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 급식소 인근에서 만난 남아무개씨(80)는 “자식 덕 봤거나 모아둔 돈이 많은 노인들은 진작에 실버타운 갔거나 크루즈 타고 여행하고 있다”며 “공짜로 밥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급식소에 감사하긴 하지만, 이렇게 지내고 싶어 지내는 건 아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약 4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4.2%를 크게 웃돌며 1위을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실제로 국내 실버타운과 크루즈의 경우 이용료가 일반 서민들이 지불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책정돼 있다. 한 분석에 따르면, 국내 유명 실버타운 30곳의 1인당 월 생활비가 지난해 기준 최소 110만원에서 최대 860만원가량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부가 같이 입주할 경우에는 최소 170만원에서 최대 1000만원 정도를 내야 한다.
또한 주로 노인이 많이 이용하는 1년 단위의 크루즈 여행은 통상 3만 달러, 4320만원 정도가 평균가인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노인 빈곤율 완화를 목표로 하면서 동시에 가난한 노인들을 위한 여가·복지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준모 건국대 행정학과 교수는 “노인분들도 여가 니즈(욕구)가 모두 다르고, 개개인의 특성이나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며 “그런 면에서 기존의 노인 여가복지 시설만으론 수용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고 했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정부와 국회가 노인 빈곤율 완화 목표를 제시하고 이행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원섭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부가 노인 빈곤율 완화 목표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국회가 노인 빈곤율을 현재 40% 수준에서 10년 후 20%로 떨어트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며 “20%로 떨어져도 중국 수준인 상황”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