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김정은이 무슨 말 해도 ‘비핵화’ 흔들리지 말아야 [쓴소리 곧은 소리]
불발된 북·미 ‘깜짝 정상회동’…근거 박약한 대북 ‘희망 회로 돌리기’ 자제를 주변 강국들은 냉혹한 ‘힘의 외교’ 추구…한미 동맹 억지력으로 북핵 좌절시켜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 순방 길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깜짝 만남을 시도해 세상을 흔들었다. 기자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반복해 김 위원장을 유인했다. 10월24일 ‘북한이 미국과 대화하려면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라는 질문에 트럼프는 “일종의 ‘뉴클리어 파워’라고 생각한다. 나는 북한이 얼마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지 알고 있고, 북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정말 많은 핵무기를 갖게 되면, 그때 나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라고 했다. 10월27일 ‘김정은에 제안할 카드는?’이라는 질문이 나오자 트럼프 대통령은 “제재가 있다. 그것은 꽤 큰 시작이고, 그게 거의 최대치일 거다”라고 대답했다. 가능성과 모호성, 자신감을 담아 대화의 물꼬를 트려는 수사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루비오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보좌관을 자기 뒤에 세워 대북 제안의 신뢰를 높였다.
트럼프의 돌발 발언은 북한을 북·중·러의 약한 고리로 인식해 전선을 흐트러뜨리며, 김 위원장의 도발 명분을 완화시켜 군사적 긴장을 낮추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미·일, 한미, 미·중 정상회담 과정에서 변수를 만들어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북핵 문제에 실질적 해법을 내놓지 못한 채 만남의 ‘포토 옵’(사진 기회)과 유튜브 ‘쇼츠’의 정치 퍼포먼스를 노리는 듯한 트럼프 대통령의 접근법은 썩 미덥지 않다. 한국의 감성적인 언론들과 대북 유화적인 정치인, 학자들도 여기에 편승해 희망 회로를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그들은 현실적 근거나 실현 가능성이 부족한데도 바라는 바를 현실이라도 된 것처럼 믿어버린다. 이런 풍조는 자칫 ‘북한을 사실상 핵무기국가(nuclear weapon state)로 인정하고, 제재를 완화해야 한다’는 쪽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 여당 의원은 “북·미 정상이 개성에서 만날 수 있다”고 감격하며 이재명 대통령의 동행을 주문하기까지 했다.
트럼프 “북한은 일종의 뉴클리어 파워”
정부 내의 목소리는 두 갈래였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시종일관, 정보와 증거는 없다며 트럼프-김정은의 만남 가능성을 희박하게 봤다. 대화의 시작일 뿐이라며 기대치를 낮추었다. 이 대통령이 꼭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한다는 메시지를 냈다. 조현 외교부 장관도 북한이 대화의 청구서를 더 키울 수 있고, 제재 문제가 대화의 전제조건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확신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부터 ‘만남 자체가 목표’인 결과 없는 만남이자, 실무적 뒷받침이 없는 만남이었다. 불발될 수밖에 없었다.
미 고위 국방 당국자가 10월22일 “북한이 극초음속 탄도미사일을 완성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으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대기권 재진입을 비롯한 비행의 전체 단계에서 완전한 성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판단을 내놨다. 10월27일에도 미 국무부 고위 관리는 “미국의 대북 정책은 여전히 비핵화”라고 못 박았다. 김정은 위원장 쪽에서도 회동 제의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일련의 신호를 보냈다. 최선희 외무상을 10월27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보냄으로써 북·러 신뢰관계를 재확인했으며, 28일 서해에서 함대지 전략순항미사일 시험발사 도발을 했다. 10월29일 트럼프 대통령도 마침내 “어느 시점에 다시 만날 것”이라고 물러섰다.
필자는 이에 대해 두 가지 관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는 준비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중용(中庸)》에서는 군자의 덕목으로 시중(時中)을 꼽고 있다. 역사와 시대정신의 때를 알고, 역량을 키워 실천하는 능력을 말한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을 돌아보면, 북한이 손을 내밀 처지에 놓였을 때 이뤄졌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후 2000년까지 대기근과 체제 위기를 겪은 ‘고난의 행군’ 시절, 2007년 10월 김정일 위원장이 건강이 좋지 않아 후계가 급할 때, 2016년 1월 4차 핵실험 이후 국제 제재가 현실화해 경제적 어려움이 임계점에 달한 때였다. 그리고 미·북의 접근은 중국의 견제를 수반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2018년 “중국이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이에 미·북은 협상했다”며 배신감을 느꼈다. 시 주석은 김정은과 첫 북·중 정상회담을 했고, 모두 5번의 회담이 이어진 연유다. 현재 김정은의 북한은 국제정치적으로 어느 때보다 강한 위치에 있다는 게 정설이다. 북·중·러의 밀착이 견고한 데다 미국의 대통령도 그를 만나려고 애쓰지 않는가.
둘째, 비핵화 없는 평화, 남북 간 평화를 외치면서 비핵화를 못 이루면 이를 납득할 국민이 별로 없을 것이다. 평화는 지키고 유지하는 힘에서 얻어진다. 비핵화 과정에서도 이익을 누가 더 많이 가져갈 것인지와 합의 준수는 힘의 논리로 귀결된다. 세 정권에 걸친 남북 정상들의 합의와 세 번의 미·북 정상회담이 다 무위가 되어버린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NPT 체제’에 의구심 들 수 있어
국제사회에는 리얼리즘이 강화되고 있다. 강한 일본을 외치는 다카이치 총리는 지금을 “전후에 가장 가혹한 안보 환경”이라고 진단한다. 트럼프·시진핑·푸틴·김정은이 추구하는 힘의 대열에 그녀도 합류한다. “국제사회는 국가와 달리, 위계를 지닌 통할 기구가 없는 무정부 상태다. 그 불안과 두려움에 각국은 공격적 능력을 키운다. 더욱이 상대국의 의도는 알지 못한다. 선의인지 악의인지 구분이 어렵고, 변덕이 심하다. 국가의 본령이 생존이므로 국가는 합리성이 지배한다”는 현실주의 이론의 설명력이 높아진다.
그런데 여당과 국책 싱크탱크, 학계, 시민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화 기반의 대북 접근파’들은 현실주의 이론과 역사적 교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핵 가진 북한’을 머리에 이고서는 남북 평화에 한계가 있음은 다 아는 이치인데, 이들은 부지불식간에 김정은 남매의 전략적 프레임에 올라탄다. 선 평화체제 희구, 남북 정상회담 만능 인식, ‘두 국가’ 동조, 한미 연합훈련 중단과 위험 감축 선행과 같은 비합리적 주장을 주문처럼 왼다. 정작 국가 존망이 걸린 비핵화 목표는 생략해 국민을 불편하게 한다. 한국의 전략적 셈법과 안보이익을 훼손하고, 북한을 오판하게 하며, 미국의 의심을 사는 처사다.
김 위원장이 아무리 핵 국가를 불가역적 사실로 쳐도, 중·러가 아무리 북한을 비호해도, 트럼프 대통령이 이벤트에 치중해도, 한국인이라면 단호히 북핵을 거부하고 비핵화를 지킬 당사자성과 통일 한국을 이룰 정체성을 잃어버려선 안 된다. 중·러가 북핵을 국제법적으로 용인하게 되면, 한국만 언제까지 ‘핵비확산체제(NPT)’에 머물러 있어야 할지 의문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E·N·D(교류·정상화·비핵화)에 이어 10월29일 APEC 한미 정상회담에서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얻어내고 국방력 확장에 나선 것은 대단히 잘한 일이다. 이제 북핵 외교와 한미 동맹의 억지력 향상을 기반으로 북한 변화의 때를 앞당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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