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생성된 일론 머스크의 투자 권유에 깜빡 속아 한순간 나락으로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점점 교묘해지는 유명인 사칭 사이버 범죄···50대 여성도 이정재 사칭범에 5억 뜯겨
연예인 등 유명인을 사칭한 사이버 범죄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사칭범들은 피해자들에게 접근한 후 투자와 고수익 등 금전적 이익을 미끼로 돈을 요구하는데, 그 수법이 워낙 교묘해 조금만 방심해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기술 발달과 맞물려 유명인을 사칭한 로맨스 스캠까지 등장하면서 피해자가 급증하고 있다.
지난 4월 경남 밀양에 사는 50대 여성 A씨는 숏폼 동영상 플랫폼인 틱톡 계정을 통해 메시지를 받았다. 발신자는 자신을 ‘배우 이정재’라고 소개했다. 사칭범은 “팬들과 소통하고 싶어 연락했다”며 접근했다.
셀카 사진과 위조한 신분증까지 보내
A씨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계정 이름과 프로필 사진도 이정재와 같아 진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칭범은 실제 이정재가 출연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3》를 화두에 올리며 영화 촬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내가 이정재가 맞으니 믿어달라”고 했고, AI로 만든 공항 셀카 사진과 위조 신분증(운전면허증)까지 보냈다.
이쯤 되자 A씨는 사칭범에 대한 의심을 풀고 진짜라고 믿게 된다. 사칭범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고, A씨를 ‘여보’ ‘꿀’이라고 부르며 연인처럼 행동했다. A씨가 이를 받아들이고 관계를 지속하자 대화를 카카오톡으로 전환하고 ‘경영진’이라는 또 다른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때부터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공범(경영진)은 “배우를 직접 만나게 해주겠다”며 600만원을 요구했고, A씨가 망설이자 “만나면 본인이 해결해 주겠다”며 안심시켰다.
한 번 돈을 보내자 ‘팬미팅 VIP 카드 발급’ 명목으로 1000만원, 이정재가 미국 공항에 억류됐다는 핑계로 수천만원을 요구하는 등 각종 명목으로 송금이 이어지게 됐다. 범행은 무려 6개월간 지속됐고, A씨는 총 5억원의 피해를 당했다. 피해 사실이 알려지자 이정재 소속사는 공식 입장을 통해 “당사는 물론 아티스트 개인도 어떠한 경우를 불문하고 금품·계좌이체·후원 등 경제적 요구를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유명인을 사칭한 로맨스 스캠은 국내외 유명 인사를 가리지 않는다. B씨(여)는 미국의 기업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사칭한 사기범에게 속아 7000만원의 피해를 보았다.
평소 B씨는 머스크의 자서전을 탐독할 만큼 열성 팬이었다. 2024년 7월 B씨의 SNS 계정으로 평소 동경하던 머스크(사칭범)가 B씨를 팔로잉하고 친구로 추가한다. B씨는 가짜일 수도 있다고 의심했지만 점점 진짜로 믿게 된다. B씨는 사칭범의 계정에 들어가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도 달았다. 얼마 후 사칭범은 B씨에게 메시지를 보내 말을 걸어왔고, 흥분한 그가 “진짜 머스크가 맞냐”고 물어보자 “맞다”는 답변이 왔다.
B씨는 사칭범과 메시지로 대화를 나누면서 진짜라고 믿게 된다. 사칭범이 “말레이시아에 갔다”고 해서 검색해 보니 진짜 일론 머스크가 말레이시아에 간 기사가 있었다. 사칭범은 B씨를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AI로 위조한 신분증과 출근하는 사진 등도 보냈다.
B씨가 사칭범을 머스크라고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영상통화였다. 머스크의 얼굴과 목소리를 AI로 생성한 영상에 깜빡 속은 것이다. 이후 사칭범은 B씨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면서 투자하면 돈을 불려주겠다고 했다. 이 말에 속은 B씨는 코인과 현금 등 총 7000만원을 입금했다.
2023년 5월에는 한국계 미국인인 유명 뮤지컬 배우 마이클 리를 사칭한 계정에 속은 50대 여성 C씨가 약 2억원을 뜯겼다. 사칭범은 이전의 사기범들과 마찬가지로 C씨의 SNS 계정을 통해 접근했고, 대화하며 친분을 쌓은 뒤 돈을 요구했다. 그는 “계좌 동결로 돈이 필요하다” “계좌 동결이 해제되면 돈을 돌려주겠다”는 등의 수법으로 계좌를 알려주고 돈을 받았다.
연예인 등 사칭한 투자 리딩 사기 활개
유명인을 사칭한 로맨스 스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SNS)에서는 사기 피해가 발생한 이정재와 일론 머스크를 사칭한 계정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도 유명인을 사칭한 계정들이 무수히 개설되고 있다.
사진과 프로필을 보면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일부 계정에는 ‘공식 계정’이라고 언급돼 있다. 일부 계정은 유명인의 공식 팬 페이지를 사칭하고 있다. 이들 사칭 계정들은 불특정 다수의 계정에 메시지를 보내거나 게시글에 댓글을 남겨 피해자가 낚일 때까지 미끼를 던지고 있다. 사칭 계정 개설 행위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없는 한 피해자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유명인을 사칭한 사이버 범죄는 해당 인물의 인지도와 신뢰도, 대중의 호감도를 이용한다. 사칭범들은 피해자들의 돈을 뜯기 위해 다양한 인물, 다양한 수법을 동원하고 있다. 가장 흔한 유형이 유명 투자 전문가나 연예인을 사칭해 투자자들을 주식이나 코인 리딩방으로 유인한 뒤 돈을 가로채는 일명 ‘투자 리딩방 사기’다.
유명인을 도용한 리딩방은 2023년 하반기부터 페이스북·인스타그램·유튜브 등에서 시작해 국내 포털사이트가 운영하는 SNS 계정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수법도 비슷하다. 사칭범들은 SNS에 유명인의 사진을 도용해 주식 등 투자 정보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광고한다. 이 광고에 속은 피해자가 링크를 통해 채팅방에 접속하면 네이버 밴드와 카카오톡 단체채팅방으로 초대한다.
채팅방에 들어가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투자를 유도하고, 멤버들은 수익을 올렸다며 투자 인증을 하면서 피해자의 투자 심리를 자극한다. 피해자가 관심을 나타내면 가짜 투자 정보를 제공하는 애플리케이션(앱)을 설치하라고 안내하거나 피싱 사이트로 유도해 투자하도록 한다. 피해자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투자 관련 책자를 무료로 나눠주고, 해외 유명 증권회사의 주식 앱을 가짜로 꾸며 50% 이상 수익이 나는 것처럼 속인 경우도 있었다. 또 투자 전문 교수를 사칭해 피해자와 직접 상대하기도 했다.
여기에 속은 피해자가 돈을 입금하면 매수 내역이 나오고 수익률은 점점 올라간다. 피해자는 투자금을 더 늘리게 되는데, 출금을 시도하면 차일피일 입금을 미루다 잠적한다. 유명인을 사칭한 범죄는 사진과 이름을 도용당한 유명인과 이들이 나온 광고를 믿고 돈을 송금하거나 투자한 사람들이 모두 피해자다.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 존리(한국 이름 이정복) 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방송인 유재석·황현희·송은이, 베스트셀러 작가 김미경, 더본코리아 백종원 대표, 배우 이영애·김상중 등 137명이 사칭 피해를 당했다.
언론인도 예외가 아니다. 손석희 전 JTBC 보도담당 사장도 사칭 광고 피해를 보았다. 사칭범은 SNS에 손 전 사장을 딥페이크한 영상 광고를 ‘소숙희’라는 이름으로 등장시켜 ‘AI의 실시간 시장분석으로 93%에 달하는 놀라운 성공률을 자랑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링크 클릭을 유도했다. 사칭 광고가 무차별 게재되자 피해자인 유명인들은 ‘온라인 피싱범죄 해결을 위한 모임’을 발족해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사칭범들은 투자에 관심을 가진 초보 투자자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한 번 걸려들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지금까지 리딩방 피해액은 1조원을 훌쩍 넘길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 중에는 결혼자금을 날린 예비 신혼부부, 사업자금을 날린 중년층, 퇴직금이나 노후자금을 날린 장년층이나 노인이 부지기수다.
문제는 한 번 피해를 당하면 사실상 회복이 어렵다는 것이다. 투자 리딩방 사기 대부분은 SNS를 통해 이뤄지고, 범행에 사용되는 휴대전화와 통장은 모두 추적이 불가능한 대포폰과 대포통장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투자 리딩 사기는 정부의 자율규제 요구와 자체 사칭 불법 광고 규제가 실시되면서 주춤하는 모양새다.
문제는 새로운 변종 사기가 계속 생겨난다는 것이다. 또 해당 유명인뿐 아니라 기획사, 방송 프로그램 제작진까지 사칭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방송인 홍석천은 최근 자신의 SNS에 “요즘 별별 사기 치는 인간들이 많다”면서 사칭 피해를 당했다고 밝혔다. 홍씨에 따르면 자신의 팬이라는 30대 남성과 사진·영상을 찍었는데, 그가 이걸 사기 범죄에 이용했다고 한다. 사칭범은 카톡 대화 내용까지 가짜로 만든 다음 주변 여성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홍석천과) 친분이 두텁다”며 돈을 빌리거나 투자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배우 김선호 소속사도 “SNS상에서 딥페이크 영상 등을 이용한 김선호 사칭행위로 금전을 요구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이 밖에 유명 연예인이나 매니저, 소속사, 방송 프로그램, 영화 제작진을 사칭해 예약한 뒤 나타나지 않는 노쇼 사기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온라인 예약 시스템의 익명성을 악용한 노쇼 사기에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유명인’ 접근해 오면 의심부터
유명인을 사칭한 사이버 범죄를 완전히 근절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주의를 당부하고 단속을 강화해도 사칭범들은 피해자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든다. 사칭범들은 철저하게 각본을 짜고 심리학자들 뺨치는 수준으로 피해자들에게 접근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당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개개인이 조심하는 것이 사기 피해를 당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온라인에서 유명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접근해 오면 무조건 의심해야 한다. 공식 인증된 계정인지를 확인하거나 이것도 쉽지 않으면 소속사에 직접 문의하는 방법도 있다.
개인 연락처나 주소, 계좌번호 등을 알려주면 절대 안 되고, 투자 유도나 어떤 명목이든 돈을 요구할 경우 100% 사기라고 봐야 한다. 이럴 때는 즉시 대화를 중단하고 해당 계정을 차단해야 한다.
만약 SNS 대화 내용 중 링크가 포함될 경우 절대 클릭해서는 안 된다. 악성 앱 설치나 피싱 사이트로 연결될 수 있다. 연애 감정을 자극하는 달콤한 유혹에 속아서도 안 된다. 그들은 피해자와 신뢰를 쌓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목표는 오로지 ‘돈’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