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싸우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

2025-11-14     김재태 편집위원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지난 10월21일 한 방송에 출연해 “대구·경북 주민은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이재명 정권과 잘 싸운다. ‘보수 전사’라는 인식이 각인돼 있다”고 했다. 내년에 있을 지방선거의 대구시장 관련 여론조사에서 이 전 위원장이 1위를 차지한 결과를 두고 한 말이다.

#.최혁진 무소속 의원은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 과정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빗대 ‘조요토미 희대요시’라고 비난하고, 친언니가 없는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과 관련해 ‘나 의원 언니 의혹’을 난데없이 제기해 빈축을 샀다. 최 의원은 이후 의정 활동 4개월 만에 후원금(연 1억5000만원) 모금을 조기 완료했다고 알렸다.

지난 국정감사 즈음에 주목받았던 이 두 에피소드에는 공통적으로 일그러진 ‘전사’의 얼굴이 담겨있다. 그 대상이 된 한 사람은 독한 말로, 또 한 사람은 조롱조의 표현으로 ‘싸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얻으며 지지층을 확보했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지엽적인 사례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미 ‘싸움’을 전면에 내세운 이들이 본진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어서다. 여당을 이끄는 정청래 대표는 대표 경선 과정에서 “싸움은 제가 할 테니 대통령은 일만 하시라”고 말한 뒤 계속 ‘거친 개혁 생각과 불안한 눈빛’ 속에 갇혀있고, 제1야당의 장동혁 대표는 당 안팎에서 우려를 제기했던 윤석열 전 대통령 면회를 마친 후 자신의 SNS에 “(윤 전 대통령이) 성경 말씀과 기도로 단단히 무장하고 계셨다”면서 “우리도 하나로 뭉쳐 싸우자”고 전의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최근엔 한동훈 전 대표까지 태세를 바꿔 거친 말 싸움판에 적극 뛰어들었다.

전현직 당대표부터 의원, 논란 끝에 자리를 잃은 고위공직자까지 우르르 나서서 “싸우자”며 주먹을 들어올리는 사이 ‘정부의 정책 수행과 예산 집행을 감시’하기 위해 진행된 올해 국정감사는 제 기능을 못 한 채 또다시 길을 잃었다. 국감의 목적인 ‘국가의 행정능력과 투명성 강화’는 물론이고 그에 따른 ‘국민의 이익 보호’도 함께 실종된 것은 물론이다. 국감이 남긴 건 욕설 논란, 파행 운영 등 그냥 ‘싸움’일 뿐이다.

그들은 싸움으로 대중의 눈길을 잡아끌고, 자신의 존재감 혹은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싶겠지만, 거친 말의 자극에 대한 민심의 환호나 인내심은 결코 길지도 단단하지도 않다. 그까짓 독한 말, 날카로운 말, 말도 안 되는 말이 무슨 문제일까라고 착각할지 모르겠으나 국민들은 그 작은 것 하나에도 걱정하거나 열불 내며 나름의 ‘악플’을 마음에 차곡차곡 쟁여두게 된다. 대안은 내놓지 못한 채 전투적인 말들만 여과 없이 뿜어내면서 싸움으로 큰 정치인들에게서 국민 삶에 대한 창의적 고민과 발상을 기대하긴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내년에 있을 지방선거나 그 후 총선에서 이른바 ‘전사’ 칭호를 들은 이들이 대거 선출돼 중책을 맡게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해지는 일이다. 싸우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책 《피로사회》에서 말한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과 같은 ‘신경성 폭력 현상’ 속에 속절없이 빠져드는 일과 다름없다. ‘야당 해산’ ‘정권 퇴진’ 같은 끝장내기 정치가 부추기는 ‘싸움 전성시대’는 지금까지만으로도 충분하다. 민의는 아랑곳없이 목소리를 높이며 덤비는 싸움꾼들을 제대로 정리하려면 싸우는 그들보다 국민들이 더 강단 있게 독해지는 수밖에 없다. 그들이 정색하며 싸워야 할 상대는 민생의 위협 요소임을 여론의 호된 매로 각성시켜야 한다.

김재태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