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대책, 구호만 난무하고 실행은 멈춰섰다…기금 집행률 ‘0%’ 지자체 속출
[시사저널 연중기획│지방소멸에 산소호흡기를⑮] 4년간 1조3000억원 미집행…인구감소지역일수록 심각, 14곳은 집행 ‘전무’ 예정된 보상·일정 충돌 연쇄 차질…제도 설계부터 허점 노출하며 현장 혼선
대한민국이 저성장·저출생의 늪에 빠졌습니다. 인구 소멸은 곧 지방소멸을 뜻하며,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는 날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의료도, 주거도, 육아도 빠진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청년이 떠나고 노인만 남는 현실이 고착되고 있습니다. 소멸과 집중의 속도를 늦추고 균형을 회복하는 일은 지금 우리 사회가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이는 지역균형발전을 약속한 이재명 정부의 시급한 시험대이기도 합니다. 시사저널은 2025년 말까지 지방소멸과 수도권 집중의 현장, 쟁점, 대안을 심층 추적하는 연중기획을 준비했습니다. 특히 각 지역 독자 여러분의 생생한 제보를 바탕으로 삶의 현장을 밀착 취재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정부는 2022년 ‘지방소멸대응기금’ 제도를 도입했다. 2031년까지 매년 1조원 규모의 재원을 마련해 지자체를 지원한다는 계획이었다. 정부가 가장 집중해서 초점을 맞춘 것은 지역 주도로 인구 감소에 대응하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지난 4년여 동안 1조원 넘는 돈이 아직 집행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정춘생 조국혁신당 의원이 최근 행정안전부로부터 제출받은 ‘지방소멸대응기금 집행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2년부터 2025년까지 배분된 기금은 모두 3조5379억원이다. 이 중 올 상반기까지 집행된 기금은 2조2105억원에 불과했다. 평균 집행률은 62.48%다. 1조3270억원의 기금이 아직 곳간에서 잠자고 있다는 얘기다.
4년 전 예산이 아직 집행되지 않은 곳도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기금 집행률도 떨어지고 있다. 기금 조성 첫해인 2022년에는 집행률이 90.4%(6755억원)를 기록했다. 하지만 2023년에는 74.1%(7380억원), 2024년에는 56.24%(5040억원)로 감소했다. 올해의 경우 상반기 기준으로 32.65%(2929억원)까지 집행률이 떨어진 상태다. 처음 예산이 배분된 지 4년여가 지난 2022년 예산이 아직 집행되지 않은 곳이 있을 정도다. 지역 주도로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한다는 기금 조성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목되는 사실은 인구가 감소 중인 지방의 기금 집행률이 24.2%로 대도시보다 낮다는 점이다. 경기도 포천시와 강원 평창군, 충북 옥천군, 충남 부여군, 전북 고창군, 전남 장성군, 경북 경주시 등 14개 지자체의 경우 집행률이 0%를 기록했다. 강원 속초시와 충북 단양군, 충남 서천군, 전북 정읍시, 전남 구례군, 경북 안동시, 경남 사천시 등 32개 지자체의 집행률도 10% 미만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광역지자체의 집행률이 75.7%인 것과 비교된다.
해당 지자체들은 기금 집행 과정에서 발생한 토지 보상 문제나 사업 일정 충돌 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문제는 이미 제도 도입 초기부터 예상됐던 사안이었다. 정춘생 의원은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가 제도 도입 이전에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면서 “귀농 지원이나 정주 여건 제고 등 기금의 취지에 맞는 사업들이 선정될 수 있도록 사업계획 평가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최근 기금 집행률을 높이기 위한 운영체계 개편에 나섰다. 기존의 ‘나눠주기’ 식에서 성과 위주로 제도를 개선한다는 게 정부의 생각이다. 요컨대 지금까지는 89개 인구감소지역과 18개 관심지역에 각각 72억원과 18억원의 기금을 기계적으로 배분했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사업 성과나 투자계획 완성도가 높은 지자체에 추가 인센티브를 준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우려도 나온다. 자칫하면 지자체 간 경쟁만 과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김동균 한국법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지방소멸대응기금을 투자계획 평가에 따라 차등 배분하는 것보다 인구 감소 심각성에 따라 배분하는 것이 취지에 더 맞는다”면서 “정부가 2021년 지정한 인구감소지역과 관심지역의 수 역시 현실에 맞는 것인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중앙정부 주도의 지원 방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정부는 지난해 지방 인프라 투자를 위해 ‘지역 활성화 투자펀드’를 설립했다. 정부 재정과 한국산업은행, 지방소멸대응기금 등을 통해 모펀드를 조성한 뒤 2028년까지 15조원의 민간 자금을 유치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민간 자금을 유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9월말 기준으로 조성한 금액은 3086억원이 전부다.
정책 펀드의 3분의 2도 수도권에 몰려
그나마 투자 실적도 여의치 않다. 3000억원 규모의 조성 금액 중에서 지금까지 집행한 금액은 217억9700만원에 불과하다. 전체 조성액의 l7.1% 수준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정책 펀드인데 실상은 마을회관 조성같이 수익성 낮은 프로젝트가 대부분”이라면서 “당초 목표한 대로 15조원을 모으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 재정이 투입된 정책 펀드 투자액의 3분의 2가량이 현재 수도권에 집중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이헌승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산업은행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8월말 기준으로 5개 정책 펀드(뉴딜펀드·성장지원펀드·소부장펀드·구조혁신펀드·지역활성화투자펀드)의 투자액은 모두 24조2065억원이다. 이 중 66%(15조9447억원)가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 몰려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조성된 ‘뉴딜펀드’가 대표적이다. 전체 투자액 중 70%가 현재 수도권에 몰려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뉴딜펀드는 ‘혁신성장펀드’로 이름을 바꿨다. 그럼에도 수도권 투자액은 여전히 절반 이상인 58.7%를 차지하고 있다. 이헌승 의원은 “지방 인프라 개발이라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단순히 예산을 확보하는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면서 “정책 펀드는 정부 재정이 투입되는 만큼 지역 차별 없이 균형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