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이 묻는다, 누가 괴물인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필생의 숙원 사업으로 영화화된 ‘프랑켄슈타인’
“창조주여, 제가 부탁했습니까? 진흙에서 저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절 끌어내 달라고?” -소설 《프랑켄슈타인》 서문에 실린 존 밀턴 ‘실낙원’의 한 구절
창작물 속에는 많은 괴물이 있다. 유전적으로 괴물의 DNA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저주를 받아 괴물이 되었거나, 분노에 잠식돼 스스로 괴물이 되었거나. 저마다의 사정이 딱하긴 하나,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이 괴물의 기구한 운명엔 비할 바가 못 된다. 이 괴물로 말할 것 같으면 죽은 시체 더미에서 태어났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조각난 시체를 꿰매어 탄생했다. 괴물을 창조한 이는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다(당신들이 괴물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 이름이다. 강조하지만 실제 괴물은 ‘이름조차’ 없다).
애초 괴물의 심성은 갓 태어난 아기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괴물에게 빅터는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빅터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아들 같은 창조물과 사랑에 빠지는 데 실패한다. 사랑이 웬 말인가. 빅터는 일반적이지 않은 외모를 지닌 괴물을 미워하고 혐오한다. 그래서 책임감 없이 버려버린다. 버려진 괴물은 홀로서기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절감한다. 남들과 다르기에 차별받고, 다르기에 공포의 대상이 되고 거부당한다. 온갖 멸시와 사람들의 증오를 먹으며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죄를 묻기로 결심한다. 그러니까 이 괴물을 진짜 괴물로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사랑받지 못함’이다. 그리고 ‘고독’이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다들 아는 척하지만 정작 읽어본 사람은 적은 메리 셸리(1797~1851)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주된 내용이다. 소설을 읽지 않고도 아는 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 이야기가 영화·뮤지컬·연극·만화 등 다양한 장르로 워낙 많이 재생산되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품을 수 있는 의문은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이 이야기로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 말이다.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프랑켄슈타인》은 이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놓는다. 기예르모 델 토로라는 창조주 덕이다.
초록색 피부에 납작한 정수리, 나사 박힌 머리와 여기저기 꿰맨 흉터. 대중에게 깊게 각인된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의 형상은 보리스 칼로프가 괴물로 출연한 1931년 동명 영화에 빚진 부분이 크다. 케네스 브래너가 연출을 맡은 1994년 작을 떠올리는 관객도 있을 텐데, 이 버전에서 괴물을 연기한 배우는 무려 로버트 드 니로였다. 메소드 연기의 달인답게 그는 캐릭터 소화를 위해 앞니를 뽑는 연기 투혼을 보이기도 했다. 다른 의미에서 괴물 같은 배우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손에서 창조된 괴물은 기존 미디어에서 그러진 괴물 이미지의 전형성을 완전히 파괴한다. 초록색 분장도, 목에 볼트도 없다. 역대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 중 외모적으로 가장 뛰어나지 않을까 싶은데, 과장을 조금 보태면 아름답다는 심성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는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신성이자 미남 배우인 제이콥 엘로디를 캐스팅했을 때부터 의도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실제로 델 토로는 “괴물의 얼굴이 대리석 조각상처럼 보이기를 원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그는 아이 같은 순수함을 지니고 태어난 괴물이 점차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델 토로의 많은 작품이 그랬듯, 잔혹하지만 서정적이고 슬프지만 매혹적이다.
데뷔작 《크로노스》(1993)부터 《악마의 등뼈》(2001), 《헬보이》(2004),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2006),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8) 등을 통해 다크 판타지의 거장으로 거듭난 델 토로는 기괴한 괴물들을 통해 동화 같은 이야기를 펼쳐왔다. 그의 작품은 대개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인간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괴물의 대립이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영화화를 이끌기에 이보다 적합한 감독이 없어 보이는 이유다.
실제로 프랑켄슈타인의 영화화는 기예르모 델 토로 필생의 숙원 사업이었다. 델 토로가 프랑켄슈타인에 얼마나 빠져 살았는가는 2015년 출간된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노트》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가 “정신을 정화시키는 곳”이라고 일컫는 작업실 중앙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소품은, 거대한 프랑켄슈타인의 머리이니 말이다.
영화 《프랑켄슈타인》 프로덕션 노트에서 델 토로는 이 사실을 더 정확하게 강조한다. “이 영화는 일곱 살에 시작된 여정을 마무리 짓는 작품입니다. 여정의 시작은 제임스 웨일 감독의 《프랑켄슈타인》(1931)을 처음 봤을 때였죠. 그 결정적인 순간, 보리스 칼로프의 눈빛을 보며 어떤 자각이 번개처럼 스쳤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고딕 호러는 제 종교가 되었고, 그는 제 메시아가 됐습니다.”
델 토로‘표’ 괴물은 다르다
델 토로‘표’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제이콥 엘로디)에게 쫓기던 빅터(오스카 아이작)가 덴마크 선박 호리손트호에 구조된 후 과거를 회고하는 액자식 구성으로 진행된다. 창조주 빅터의 시선과 괴물의 시선에서 1막과 2막이 각각 그려진 후, 구원과 용서의 서사로 뻗어나가는 여정이다.
메리 셸리의 원작 소설에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가 붙었듯, 1막에 해당하는 빅터의 이야기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모티브로 작용한다.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한 빅터의 실험은 신의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와 병치된다. 신의 영역에 도전한 후,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치한 빅터의 욕망과 오만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누가 괴물인가.’ 영화에 빅터와 괴물을 함께 비추는 거울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빅터는 자신에게서 그토록 미워했던 괴물과도 같은 모습을 본다.
괴물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2막에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깔려있다. 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지니고 태어난 괴물은 길 위에서 만난 인간들을 돕는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감사하다는 말이 아니라 혐오다. 200년 전 이야기지만, 타자를 향한 혐오가 만연한 오늘날에도 관통하는 부분이 많다. 아니, 오늘날이어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다. 게다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AI에 환호하는 동시에 두려워하기도 하는 지금 시대에 여러모로 시의적절한 영화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