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비색(否塞)의 시대를 잘 살아내는 법

2025-11-22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주역》을 공부하면서 태평성대의 의미를 비로소 정확하게 알았다. 그 답은 태괘(泰卦·***)에 있었다. 태평(太平)이란 그저 잘 먹고 잘살고 아무 일 없는 그런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태평이라기보다는 태통(泰通)하는 세상이 공자가 생각했던 태평성대의 본래 의미였다.

그러고 보면 잘 먹고 잘살고 전쟁 없기로야 2025년의 대한민국만 한 나라가 또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K 어쩌고어쩌고하면 지금 대한민국은 태태평평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목에 탁 걸리는 것은 무엇일까? 통(通)이다. 화통(和通)이 없고 소통(疏通)은 사라졌고 곳곳이 엉기고 막혀버렸다. 상하가 불통(不通)이고 좌우가 불화(不和)하고 있다.

과거에 양극단을 중재하던 중간 식자 그룹은 증발해 버렸다. 흔히 말하는 우리 사회의 건강한 중간층을 대변할 수 있는 스피커가 사라진 것이다. 이런 지식인 그룹의 목소리를 들어본 지 20년은 넘은 듯하다. 예전에는 지식인의 침묵 운운하며 비판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지식인의 멸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지식인 대부분이 어느 한쪽에 투항해 버린 결과다.

정치권에서 미래 비전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인 혹은 학계에서도 미래에 대한 담론은 소멸되었다. 사회 어느 구석에서도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오직 당장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진영에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만을 잣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여기에는 좌우도 여야도 없다.

비색(否塞)의 시대, 모든 것이 꽉 막힌 세상이다. ‘주역’이 수천 년 전에 이 문제를 고민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왜 막혔을까? 비괘(否卦)가 말한다. 건괘(乾卦·☰)는 임금이라고 위에만 있으려 하고 곤괘(坤卦·☷)는 신하라고 아래에 그저 머물러 있다. 위에서는 힘으로 아래를 이끌려 하고 아래에서는 마지못해 최소한의 도리만 한다. 이렇게 해서는 위아래가 마음으로 통하는 바가 없다.

다시 태괘의 모양을 보라. 위에 있어야 할 건괘가 아래에 있다. 자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임금이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고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그러면 신하 또한 자기를 더 낮추어 임금을 대하게 된다. 공무원 핸드폰을 열어보겠다는 것은 태괘일까 비괘일까?

비색의 시대가 오래되면 그 사회는 비관주의가 지배하게 된다. 바람직한 사회 변화를 입에 올리면 냉소의 대상이 된다. 요즘 우리 사회가 딱 그렇다.

《논어》에는 여러 유형의 은둔자가 등장한다. 그 은둔자들이 바로 시대의 비색을 비관해 숨어 사는 사람들이다. 문지기나 하면서 숨어 지내던 사람은 공자에 대해 “안 되는 줄 알면서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폄하한다. 또 장저와 걸닉이라는 은둔자는 농사를 지으며 숨어 지내다 공자의 제자 자로에게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기보다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권한다. 사람을 피하는 선비란 공자이고 세상을 피하는 선비란 본인들이다.

이 말을 자로에게서 전해 들은 공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조수와는 더불어 함께 무리 지어 살 수가 없으니 내가 이 사람들 무리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누구와 함께하겠느냐?”

조수란 장저와 걸닉처럼 자기 한 몸 지키자고 숨어 지내는 냉소주의자이고, 이 사람들 무리란 천하에 도리가 없어 고통받는 백성들이다.

또 다른 은둔자를 만나 “사지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오곡을 제대로 분별도 못 하는 자”라는 비판을 받은 공자는 “군자가 벼슬을 하는 까닭은 의로움을 행하기 위함이다. 도리가 행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은 작더라도 미래를 이야기하고 희망을 말하는 것이 의로움을 행하는 것이다. 어딘가에서부터 미래의 희망이 싹터주기를 바란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