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 2호기 ‘수명 연장’에 숨은 원전 로드맵은…“SMR을 첨단전략산업으로” 목소리

새 정부 첫 ‘수명 연장’ 결정…실용주의 메시지에 노후 원전들 운명 주목 ‘작고 강한 원전’ SMR 주목…“AI 시대 주도권 잡을 골든타임 놓쳐선 안 돼”

2025-11-22     조유빈 기자

멈춰있던 고리 원자력발전소 2호기(고리 2호기)가 다시 돌아가게 됐다. 이재명 정부 들어 처음 결정된 노후 원전의 ‘수명 연장’이다. 정부가 에너지 정책에서 실용주의 카드를 본격적으로 꺼냈다는 평가다. 2030년을 전후해 무려 9기의 원전이 수명 연장 판단을 받아야 하는 가운데, 이번 결정은 한국 원전 정책의 향후 방향을 가늠할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인공지능(AI) 인프라 확장으로 전력 수요 폭증이 예견된 상황에서, 안전성이 보장된 대형원전의 계속운전과 소형모듈원전(SMR) 상용화를 병행하는 투트랙 전략의 필요성도 부각된다. 한국이 원전의 운영과 제조 등에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AI 시대에 SMR 산업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고리원전 2호기의 계속운전이 11월13일 허가됐다. 사진은 고리 2호기(왼쪽부터)·1호기·3호기·4호기의 모습 ⓒ연합뉴스

대기 중인 다른 원전 9기도 허가 가능성

국내 최장수 상용 원전인 고리 2호기는 40살이 된 2023년 4월 멈췄다. 원전의 설계수명 기간인 40년이 만료된 후에도 계속 가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은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한다. 9월과 10월 진행된 두 차례 심의에서도 나오지 못했던 결론이 11월13일 내려졌다. 연장된 고리 2호기의 추가 수명은 10년으로, 2033년 4월까지 가동할 수 있게 됐다. 다만 최종 승인이 늦어지면서 실제 추가 가동할 수 있는 기간은 7년2개월가량 될 전망이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고리 2호기의 재가동 목표 시점을 내년 2월로 잡고 있다. 한수원 관계자는 “재가동 전 필수 조치 사항의 설비 개선 작업에 착수해 추진 중”이라며 “일부 설비의 기기·케이블 교체 등을 완료하고 계획 예방정비를 거친 뒤, 안전성을 확인한 후 재가동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후속 호기의 계속운전 인허가 절차도 차질 없이 추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번 결정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정부가 ‘AI 세계 3대 강국’이라는 국정 목표를 뒷받침할 전력 확보를 위해 원전 축소 움직임을 멈췄다는 시각이 나온다. AI 데이터센터 증설이 이어지며 막대한 에너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미래 전력난을 해결하기 위한 카드 중 하나로 노후 원전의 계속운전을 결정한 것이다. 전제는 ‘안전성’이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9월11일 기자회견에서 “가동 기간이 지난 원전도 안전성이 담보되면 연장해 사용하고, 짓고 있는 것은 잘 지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고리 2호기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대기 중인 원전 9기의 계속운전도 안전성을 전제로 허가될 가능성이 커졌다. 현재 가동이 멈춰있는 고리 3·4호기를 비롯해 한빛 1·2호기, 한울 1·2호기, 월성 2·3·4호기의 안전성 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심형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원전의 ‘설계수명 기간’은 인허가를 받은 ‘운영허가 기간’에 해당한다. 원전은 부품만 수십만 개에 달하는 고도의 공학시설이기 때문에 안전 문제를 판단하기 어렵다. 국가가 이를 대신 확인하기 위해 규제 기간과 인허가 체계를 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구조물 중 연한이 다한 것은 운전 과정에서도 교체한다. 실제로 40년을 운전하고도 ‘더 사용할 수 없다’는 신호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국 등에서 원전의 수명을 80~90년까지 연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라고 설명했다.

원전 업계는 계속운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OECD NEA(Nuclear Energy Agency) 등에서 원전이 탈탄소·기후중립 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평가한 것도 그 근거다. 특히 원전은 에너지원의 경제성을 보여주는 균등화발전비용(LCOE)이 다른 발전소에 비해 적은 편이다. LCOE는 발전소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 들어간 총 비용을 발전량으로 나눈 값이다. 원전의 건설 비용은 크지만 연료비가 낮기 때문에 사용 기간이 길어질수록 LCOE가 낮아진다는 것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원전 계속운전의 효용성과 제도 개선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설립된 원전을 계속 가동할 때 LCOE은 MWh당 21달러다. 석탄발전(48달러), LNG 복합화력발전(90달러) 등에 비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원전이 멈춘 뒤 계속운전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기복 원자력학회장은 “계속운전 인허가 취득 후에 설비 개선에 착수하게 돼 10년의 계속운전 기간을 확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실질적인 운영 기간이 감소한다”며 “설계수명 이후 운전 중단 없이 심사가 가능하도록 임시 운전승인이나 임시 운영허가를 발급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계속운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크다는 점에서, 한수원은 계속운전 기간 등 제도를 합리적으로 개편하기 위해 원안위 등 관계기관과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韓 원전 생태계 확고해…SMR 경쟁력 있어

정부가 계속운전 결정을 통해 에너지 믹스 기조를 보인 상황에서, 차세대 원전이 될 SMR 산업에 빠른 시일 내에 올라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 한국은 혁신형 SMR(i-SMR)을 국가연구개발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올해 표준설계를 완료한 후 2028년까지 인허가를 마칠 계획이다. 인허가 취득 후 2035년까지 혁신형 SMR 초도기 건설을 완료한다는 구상이다.

전력이 AI 대전환 시대의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핵심 인프라이니만큼 산업 질서가 잡히기 시작할 때 지분을 확보하고, 표준화 과정과 규제 수립 절차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업계는 크기가 작은 SMR의 경우 공사 기간이 3년 전후로 짧고 안전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원전의 약점을 지워내며 전력을 공급하는 확실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MS) 등 빅테크 기업들이 전력원을 SMR로 전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자 정치권에서는 SMR을 국가첨단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성장 곡선 초입에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미래경제성장전략위원장인 이언주 의원은 “SMR은 단순히 기존 원전을 개선하는 수준이 아니라, 지금의 발전·에너지 질서를 재편하고 전환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며 “효율성이 높고 소형화된 SMR은 데이터센터·연구시설 등 초전력 수요 산업의 핵심 인프라가 될 수 있다. 핵잠수함을 비롯해 미래 산업의 향방을 결정할 초대형·초효율 배터리 같은 개념”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중이 주도하는 대규모 연구개발 흐름 속에서도 SMR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은 SMR 산업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를 마주한 것”이라며 “효율성과 경제성도 중요하지만 주도성을 잃으면 한국은 결국 ‘을’의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웨스팅하우스와의 협상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구조적 한계를 겪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SMR 산업의 표준화와 거버넌스가 형성되는 시점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지분을 확보하고, 이를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SMR 산업에서도 한국은 강점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 교수는 “뉴스케일파워나 엑스에너지 등 글로벌 SMR 설계 기업들도 제조는 한국 두산에너빌리티에 맡긴다. 불가리아 원전 프로젝트에도 현대건설이 참여하는 등 대형원전에서도 한국 기업의 제작·시공 능력은 인정받고 있다”며 “운영사나 제작사가 공정에 개입한다면 운영성과 제작성을 서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혁신형 SMR을 만들면서 형성된 ‘원팀’ 체계를 통해 최적화를 실현할 수 있다. 원전 생태계가 건전하고 확고한 한국은 SMR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