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까지 투입한다는데…고환율, 쉽게 꺾이지 않는 이유는

무역 협상 이전으로 돌아간 원화 가치, 두 달 새 70원 ↑ 개인·기관 해외투자 수요 압도…미국 견제로 개입도 쉽지 않아

2025-11-25     오유진 기자
25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현황판에 코스피 지수 등이 표시되고 있다. 이날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 대비 1.9원 내린 1,475.2원으로 개장했다. ⓒ 연합뉴스

정부가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카드로 국민연금까지 꺼내 들었다. 원-달러 환율이 1470원을 돌파하자, 국민연금의 외화 자산을 활용해 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달러의 근본 원인인 달러 수급이 이어지는 한 원화 가치가 쉽게 회복되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인위적 시장 개입을 주시하고 있는 미국 또한 당국의 적극적인 시장 대응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지난 4월9일 대미 관세 발표 직후 수준까지 하락해 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25일 서울외환시장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오후 1시40분 기준 1473.9원에 거래되고 있다. 전 거래일 종가(1477.1원) 대비 소폭 하락했지만, 여전히 1470원선에서 상승 압박을 받고 있는 모양새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9월25일(1400.6원) 1400원선을 넘어선 이후 1400원선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강달러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당국은 지난 9월까지만 해도 한·미 무역 협상이 체결되면 원화 가치가 빠르게 원상 복구될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로 연중 원화 가치의 흐름은 관세 협상의 추진 속도와 사실상 동일하게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무역 협상이 첫 합의점을 찾은 지난 7월 말 원화 가치가 연중 최고 수준까지 올랐던 이유다. 그러나 ‘서학개미’를 중심으로 달러 매수 수요가 좀처럼 꺾이지 않으면서 원화 가치는 끝 모를 약세를 이어가고 있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 정부 셧다운 해제 이후 달러인덱스(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지표)가 하락하고, 국내 증시는 반등했음에도 원화 가치는 4월 이후 최저 수준에 도달했다”며 “이런 움직임은 미국과의 금리차 축소, 반도체 수출 호조 등 기본적인 펀더멘탈과는 괴리가 벌어진 상황으로, 원화 약세를 기대하는 쪽으로 수급이 쏠리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시장의 불확실성이 제거되면 안정되던 통상적인 외환시장과는 정반대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당국은 전날 본격적으로 외환시장 개입 의사를 밝혔다. 기획재정부는 24일 기재부·보건복지부·한국은행·국민연금이 4자 협의체를 구성해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확대로 인한 외환시장 점검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국민연금의 해외투자가 원화 약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연금을 활용해 환율 방어에 나서겠다는 취지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따르면, 8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해외투자액은 약 771조3000억원으로 전체 적립금의 58.4%에 달한다.

구체적인 대응 방안은 아직 논의되지 않았지만, 국민연금의 전략적·전술적 환 헤지 비중을 조정하는 방안이 유력한 시나리오로 꼽힌다. 전략적 환 헤지는 원화 가치가 일정 수준 하락하면 국민연금이 보유한 달러 자산(선물환 거래)을 시장에 내놓아 달러 유동성을 늘리는 방식이다. 일각에서는 한국은행과 국민연금이 올해 말까지 체결한 통화스와프(약 650억 달러 규모) 계약이 연장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국민연금만으론 역부족…미국과의 마찰도 변수

그러나 시장에서는 강달러의 구조적 수급이 유지되는 한 판도가 바뀌긴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수출입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투자자들까지 달러 자산 비중을 늘리는 상황에서, 전체 시장의 약 10%에 불과한 환 헤지 조정만으로는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이유에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기준 국내 거주자의 해외 증권 순투자 규모는 998억 달러로, 외국인 유입액(296억 달러)의 3배가 넘는다.

위재현 NH선물 이코노미스트는 “해외주식 투자 총잔액 중 국민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41%로, 당장 시장이 고민해야 할 부분은 개인과 기관의 수급”이라며 “국민연금이 해외주식에 투자한 이상의 금액을 개인과 기관이 보유하고 있어 수급 불안은 당장 사라지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정부로서는 외환시장을 감시하는 미국의 견제 또한 부담 요인이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 6월 환율 보고서에서 국민연금의 외환스와프가 원화 가치에 우회적으로 개입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정부와 미국 재무부가 지난달 1일 환율정책에 합의하면서 개입 여지가 일부 확대됐지만, 국민연금을 적극적인 환율 안정 수단으로 활용하면 미국과의 마찰이 재점화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한국은 현재 미국의 환율 관찰대상국에 포함돼 있다.

외환시장의 향방은 오는 12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금리 인하 여부와는 별개로 개인투자자들의 달러 수요가 지속되면 당국의 영향력 또한 제한적일 수 있다. 소재용 신한은행 S&T센터 이코노미스트는 “연준 다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금리 인하에 신중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어, 연준의 금리 인하 뚜껑을 열어 봐야 외환당국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마지노선인 1480원대를 내주면 1500원도 쉬워 보이는 상황인데, 개인투자자들의 힘이 만만치 않아 주의가 필요하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