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은 신종 시위 진압술?

1996-10-24     成耆英 기자
“앞사람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숙인 채 끌려 내려오는데 여학생들 가슴을 만지는 전경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조금이라도 반항해 보려 하면 곤봉으로 머리를 내려치고….” “경찰서 대기실에서는 일부러 다리를 벌리고 앉게 했어요. 한여름이라 반바지를 입은 여학생들이 많았는데….”

8월 한 달 내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총련 사태가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막을 내린 지 한 달쯤 지난 9월13일, 한 인권 단체 사무실에서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당한 성추행·폭언 사례들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37개 재야·사회 단체가 모여 만든 ‘한총련 강경 진압 및 탄압에 대한 비상대책위원회(한총련 비대위·실행위원장 최규엽 전국연합 정책위원장)’는 이날 모두 1백8건의 인권 피해 사례 중 성추행 사례만 41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경찰서 조사 과정에서도 성추행·폭언 당했다”

그런데도 흐지부지 넘어가는가 했던 이 문제가 국정감사장에서 다시 논란이 되었다. 지난 10월9일 서울 경찰청에 대한 국회 내무위 국정감사에서 추미애(국민회의) 의원이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공권력의 성추행 논란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추의원이 학생들의 주장을 인용해 경찰의 성추행·폭언 등을 공개하자 여당 의원들이 추의원의 발언 내용을 둘러싸고 ‘의원 품위’ 논쟁을 걸고 나선 것이다. 결국 국정조사권을 발동하자는 야당 의원들의 제안은 표결까지 간 끝에 부결되고 성추행 논란은 촌극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인권·사회 단체들은 국정조사권이나 국회 진상조사위 구성과 관계 없이 학생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총련 사태 진압과 조사 당시의 성추행뿐만 아니라 폭행 등 광범위한 인권 침해 사례에 대해 고소·고발까지 벌여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한총련 비대위는 이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학생들의 재판이 시작되면 다음달쯤 해당 경찰서장 등을 상대로 고소·고발 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한총련 비대위에 따르면, 국정감사에서 증인 채택 요청이 있을 경우에 대비해 학생 5∼6명이 증언에 나설 뜻을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성추행 당한 일부 여학생들은 정신적 후유증까지 겪을 가능성이 있어 이 문제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동교신경정신과 배기영 원장은 “성적 경험이 전혀 없는 여성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추행·폭언 등을 당하게 되면 불안·초조·두통을 동반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물론 경찰청은 국민회의나 사회 단체들의 주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황용하 서울 경찰청장은 내무위 국감에서 국민회의측의 폭로에 대해 ‘전혀 근거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연행 과정에서 불특정 다수 경찰에 의한 우발적인 성추행은 관련 당사자를 찾아내기 어렵다고 쳐도 경찰서 조사나 수용 과정에서 당한 성추행이나 성적 모욕·폭언은 학생들이 주장하는 사례가 매우 구체적이어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현재까지 공개된 사례는 불구속 상태인 학생들만 상대로 한 것인데 구속된 학생들이 당한 사례가 추가 폭로된다면 경찰의 도덕성과 관련해 큰 파문이 일 가능성도 있다. 이 문제는 구속 학생 변호를 맡고 있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변호사들이 중심이 되어 추가 증언 확보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재판 과정에서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