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이 무너지는 사회’에 실망한 청년들, 야구장으로 몰린다
동일한 규칙에 따라 경기 치르고, 이기든 지든 결과에 승복 약팀이 강팀을 꺾는 ‘언더독의 반란’에 열광하기도
이제 스포츠는 단순히 즐길거리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산업이 되기도 한다. 영국에서 축구가 그렇다. 프리미어리그(EPL) 20개 구단의 1년 매출 합계액은 우리 돈으로 10조원이 넘는다. 2024~25 프리미어리그 우승팀 리버풀FC는 지난 시즌 매출이 7억 파운드(약 1조3000억원)를 돌파했다고 전해진다. 맨체스터 시티에 이어 EPL 두 번째다. 스폰서십 계약, TV 중계권료, 입장권과 식음료 판매 등은 각 구단에 대기업 이상의 매출을 안겨준다.
영국에 프리미어리그가 있다면 우리나라엔 KBO리그가 있다. 바야흐로 1200만 관중 시대. 프로야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프로스포츠다. 현대경제연구원은 9월말 발표한 보고서에서 한국 프로야구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무려 1조1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KBO리그가 우리나라에서만 소비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액수라 할 수 있다.
관중의 60%가량은 20·30대…프로야구장은 ‘가심비 끝판왕’
프로야구 열풍을 이끄는 건 2030세대다. 중장년 남성이 주를 이루는 미국·일본과 달리, 우리나라 프로야구 관중의 60%가량은 20·30대다. 남성과 여성 비율은 대략 4대6, 2030 여성 관중이 전체의 약 40%나 된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프로야구에 열광하게 만드는 걸까.
주로 꼽히는 이유는 코로나 팬데믹이다.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위축된 사회활동 욕구가 야구를 통해 분출되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2010년대 700만~800만 명 수준이었던 프로야구 관중 수는 팬데믹 직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22년 약 607만 명이던 게 2023년 약 810만 명으로 훌쩍 뛰었고, 2024년에는 천만(1087만 명)을 돌파했다.
여기에 고물가가 겹쳤다. 코로나19 당시 각국은 경쟁적으로 재난지원금을 살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전 세계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22년 5.1%, 2023년 3.6%를 기록했다. 식료품과 음식 및 숙박 서비스 물가는 그것을 훌쩍 웃돌았다. 외식비 부담이 크게 늘어났다. 서민의 상징인 소주 한 병이 5000~6000원 하는 시대. 이때 야구장은 좋은 대안이 된다. 경기를 보며 치맥도 즐길 수 있다. 야구장 자체가 일종의 ‘야장’(길거리나 야외에 간이 테이블을 설치해 음식이나 술을 판매하는 것)으로 기능하는 셈이다.
물론 가격이 아주 싼 건 아니다. 한국프로스포츠협회가 발간한 ‘2024년 프로스포츠 관람객 성향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프로야구 팬들은 경기장 방문 시 입장료+교통비+식음료비 명목으로 평균 5만1449원을 지출했다. 자주 가기엔 부담스러운 금액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팬들에게 중요한 건 ‘가심비’다. 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가 높다면, 그 정도 비용은 기꺼이 지출할 수 있다. 심리적 만족도를 높여주는 기제는 팬심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프로야구의 팬덤화 현상이 더욱 뚜렷해졌다. 이 현상을 추동하는 건 2030 여성들이다. 이들이 프로야구 핵심 팬층으로 성장한 데는 K팝 시장의 변화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 걸로 보인다. K팝이 너무 ‘글로벌’해진 것이다. K팝 아이돌은 이제 한국의 아이돌이 아니다. 세계의 아이돌이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이돌 그룹들은 국내 활동을 기본으로 하고 곁가지로 해외 일정을 소화했다.
그런데 K팝의 저변이 넓어지며 해외 활동 비중이 대단히 높아졌다. 요즘 인기 아이돌들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다가 어쩌다 한국에 들어온다. 우상을 떠나보낸 여성들은 새로운 우상을 찾았다. 그게 프로야구다. 심지어 야구는 일주일에 여섯 번이나 경기를 치른다. 시즌 중에는 월요일 하루만 쉬고 매일 경기를 한다. 원한다면 언제든 선수들을 찾아갈 수 있다.
과감한 ABS 도입으로 투명성과 신뢰도 높여
스포츠가 제공하는 쾌감도 2030세대를 야구장으로 끌어들이는 핵심 요인이다. 그 쾌감은 공정한 경쟁에서 온다. 청년들의 삶은 불공정의 연속이다. 입시와 취업이 그렇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앞선 위치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경쟁을 치른다. 결과를 좌우하는 건 개인의 능력과 노력보다는 배경이다. 우리 사회 정도면 투명한 편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걸핏하면 불거지는 정치인 자녀의 입시 비리, 공공기관 채용 비리는 절망감만 안겨준다. 권력자들은 설령 규칙을 어긴 게 탄로 나더라도 금세 면죄부를 받는다.
스포츠의 세계는 다르다. 선수들은 모두가 동일한 규칙에 따라 경기를 치른다. 그리고 이기든 지든 결과에 승복한다. 공정성은 스포츠의 생명이다. 팀마다 자본력 차이에 따른 유불리는 존재하겠지만, 우리가 사회에서 경험하는 거에 비하면 그 격차는 크지 않다. 약해 보이는 팀이 강팀을 꺾는 쾌감은 더 짜릿하다. ‘언더독’의 반란이 자주 일어나는 게 스포츠의 묘미 아닌가.
같은 맥락에서 스포츠 팬들은 스포츠의 공정성이 외부적인 요인으로 훼손될 때 분노한다. 15년 전 e스포츠 스타크래프트 리그에서 10여 명의 선수가 승부조작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리그 전체가 신뢰를 잃은 적이 있다. 이 사건은 한때 10만 관중을 동원했던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문을 닫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여러 스포츠협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비슷하다.
대한배드민턴협회는 국가대표 안세영 선수와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임원들의 횡령·배임 및 직장 내 괴롭힘으로 도마에 올랐다. 대한축구협회도 협회장의 사유화 의혹이나 감독 선임 과정에서의 불투명성 문제가 끊임없이 대두된다. 청년들은 일부 몰상식한 협회가 스포츠를 목적이 아닌 정치적·금전적 이윤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이 스포츠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훼손하는 데 큰 반감을 보인다. 스포츠는 공정의 가치가 지켜져야 할, 우리 사회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KBO가 경기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도 프로야구 인기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KBO는 2024년 자동투구판정시스템(ABS)을 도입했다. ABS는 구장에 설치된 카메라를 활용해 스트라이크존을 판정하는 시스템으로, 정규리그에 본격 도입한 건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다. 덕분에 한국 프로야구는 판정 시비를 대폭 줄였다. 기계 판독은 시기상조라는 비판이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KBO의 과감한 결단은 결과적으로 야구 경기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고 KBO리그를 팬들로부터 신뢰받는 리그로 만들었다.
프로야구의 인기 비결은 다른 종목에도 좋은 본보기가 된다. 공정, 경쟁, 존중, 도전 등 스포츠가 스포츠 본연의 가치에 충실할 때 팬들도 열렬한 성원으로 화답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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