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망치는 자살골 '시축'
  • 장원재(숭실대 교수) ()
  • 승인 2001.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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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경시 풍조 반영…사회 인식 바뀌어야 '16강' 가능
지난 12월1일에 있었던 월드컵 조 편성 추첨 행사 이후, 모든 언론 매체는 한국팀의 16강 진출 여부에 엄청난 관심을 쏟아 붓고 있다. 우리와 같은 조에 속한 포르투갈·폴란드·미국에 대한 전력 분석과 경기 예상 평이 이어지고, 미국을 잡고 폴란드와 비긴 뒤 포르투갈에 적은 점수 차로 패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16강 진출 시나리오라는 시뮬레이션 결과까지 지면의 한켠을 장식하고 있다.




월드컵 16강 진출은 단순히 스포츠 내적인 성취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국제적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월드컵에서의 성취와 국가의 전반적 능력 사이에 밀접한 함수 관계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므로, 월드컵이라는 스포츠 이벤트가 한편으로는 어떤 국가의 종합 역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정치·경제·사회적 이벤트로 읽히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따라서, 현대 문화에서 축구가 차지하는 비중, 월드컵에 쏠리는 범지구적 관심 등을 고려할 때, 한국팀의 16강 진출은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 나아가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리고, 국가 이미지의 격조를 높임과 동시에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경제적 이득도 볼 수 있는 문명사적 일대 사건과 다름없을 터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정녕 16강에 진출할 만한 자격이 있는 나라인가. 경기 외적인 면을 고려하면, 유감스럽게도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축구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관심도를 기준해서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16강 진출을 바라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이다. 사회적 지원은 경쟁국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비슷한 결과를 내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우리 정부는 월드컵을 치르기 위해 경기장 여덟 군데를 새로 지었고, 각 경기장의 개장 기념 행사에는 으레 인기 가수들의 축하 공연과 민속놀이 그리고 시축이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 거의 관례처럼 굳어진 이같은 식전 행사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인 전문가 경시 풍조의 종합 축소판을 보는 듯하여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본적으로 남의 전문성을 그에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이용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희박하다. 건실한 사회는 여러 방면에서 두터운 전문가층을 확보하고 있는 사회이다. 전문가란, 한 사회의 힘을 집약해 비약이 가능한 상태로 전환할 능력을 가진 창조적 개인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전문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고 해서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전문성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은 인생을 담보로 건 희대의 도박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희생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어느 누가 전문가가 되려고 이를 악물고 밤잠을 마다하겠는가. 그러므로, 전문가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사회는, 어설픈 실험이 판치는, 질적으로 도약하기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영원한 아마추어들의 경연장이 될 수밖에 없다.


유럽 선수들, 시축 행사 보고 경악


아마추어들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자기가 모르는 분야라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 둘째, 이런 인식을 가지고 남의 전문 영역을 수시로 침범한다는 점. 국가 대표급 축구 선수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년 이상 직업 훈련을 받은 선수 중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 사람들만을 가려 뽑은 고도의 전문가 집단이다. 전문가에게 전문성을 발휘할 여건을 제대로 마련해 주지도 않고, 드러난 결과만을 보고 관계자들을 질책하는 일만큼 무책임한 일은 없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한 장관이 한국 팀 캠프를 격려하러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한 적이 있다. 그 분의 일정에 따라 한국 대표팀의 훈련 시간이 재조정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먼 길을 찾아가신 분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 분이 보여준 '나름의 호의'는 결론적으로 한국 팀의 경기력을 확실히 저하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전문가 경시 풍조가 훈련장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축구장은 축구 경기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전문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된 공간이다. 따라서, 유럽 축구계에서는 선수가 아닌 사람들은 가급적 경기장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는 묵계를 모두가 준수한다. 축구라는 기능에 관한 한 일반인의 수준을 넘지 않는 사람들이 경기장 한복판에다 공을 갖다 놓고 시축이라는 행사를 주재하는 일은, 그러므로 남의 전문성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 폭거나 다름없다. 전문가를 우대하는 풍토에 익숙한 유럽 리그 출신 선수들 중에는 시축이라는 전대미문의 행사를 통해 일종의 문화 충격을 경험했다고 토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일이 국제 경기에서 거듭되는 한, 외국 축구 평론 전문가들, 특히 유럽 축구 기자들이 우리나라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언제나 벌어지는 축구 후진국'이라고 매도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2002년 5월31일, 제17회 월드컵 축구대회 개막 행사가 전문가들을 배려하는 쪽으로 치러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이같은 까닭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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