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은 있어도 좌절은 없는 ‘황제’
  • 오윤현 기자 (noma@e-sisa.co.kr)
  • 승인 2002.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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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아 출신 마이클 조던, 고난 닥치면 더 강해져…이혼 위기 극복할지 관심
올해 초만 해도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39·워싱턴 위저즈)의 앞길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그가 속한 팀은 지난해 말에 최고 9연승을 올렸고, 조던은 1월6일 미국 프로 농구(NBA) 사상 네 번째로 3만점을 돌파하며 농구 황제의 위용을 뽐냈다. 지난해 12월28일에 NBA 데뷔 후 6점이라는 최소 득점을 기록했지만, 이틀 후 경기에서 51점을 몰아 넣음으로써 잃었던 명예를 곧바로 되찾기도 했다.




조던은 1월9일에도 감각적인 경기를 펼쳤다. 워싱턴 MCI 센터에서 열린 LA 클리퍼스와의 경기에서 18 득점에 10 리바운드, 그리고 8 도움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현란한 드리블로 상대를 현혹하는 조던의 모습은 평상시와 다름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의 속마음은 떨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며칠 전 아내 주아니타 조던으로부터 이혼 소송을 당했기 때문이다.


1989년 조던과 결혼한 주아니타(43)는 1월5일 일리노이 주 순회법원에 제출한 이혼 소장에서 ‘조던과의 결혼 생활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았다’고 소송 배경을 밝혔다. 거기에 덧붙여 주아니타는 세 자녀에 대한 영구 양육권과, 재산의 절반(1억9천9백만 달러)을 떼어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AP통신은 은퇴 3년 만에 코트에 복귀한 조던이 시카고에 가족을 남겨둔 채 워싱턴에 너무 오래 머물러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분석했다.


아내의 이혼 소송에 대해 조던은 “잘 해결될 것이다. …개인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는 운동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가정과 일을 거의 완벽하게 관리해온 조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사실에 놀라움을 나타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조던에게 시련은 별로 낯선 것이 아니다.


고2 때까지 2군 생활, NBA 드래프트에서 ‘쓴맛’


어릴 때 조던은 몹시 게으르고 거친 소년이었다. 야구와 운동을 즐겼지만, 학교와 가정에서 항상 문제를 달고 다녔다. 첫 번째 시련은 아홉 살 때 찾아왔다. 소다수를 마시기 위해 학교를 이탈했다가 사흘간 정학 처분을 받은 것이다. 기계수리공이었던 아버지와 은행 출납계 직원이었던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과 농구가 없었다면 그는 잘못된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야생마처럼 길들이기 어려운 문제아였다.


고등학교 때에는 생애 처음으로 열등감을 맛보아야 했다. 원하는 학교의 선수가 되었지만 키(180cm)가 작아 1군에 끼지 못하고 2군에 머물렀던 것이다. 하루 7백∼8백 개씩 슛을 날리며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천재적인 실력이 드러난 것은 3학년 때였다. 조던은 그 해 평균 26 득점, 12 리바운드, 4 도움이라는 놀라운 기량을 선보이며, 여러 대학으로부터 ‘구애’를 받았다.


그가 선택한 곳은 농구 명문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이었다. 그 시절은 그에게 영광의 날들이었다. 1학년 풋내기가 미국대학리그 결승전에서 역전 슛을 성공시켜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가 하면, 2학년 때에는 게임당 평균 20점 이상을 올렸다. 대학 때에는 <스포츠 뉴스>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두 번이나 뽑히고, 미국대학리그 최고 선수에게 주는 나이스미스 상과 존 우든 상을 거머쥐었다.


여세를 몰아 조던은 대학 3학년 때 NBA에 드래프트를 신청했다. 드래프트가 열리던 날 조던은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지명 과정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1위 지명권을 가진 휴스턴 로케츠가 가장 기량이 뛰어난 센터로 평가되던 하킴 올라주원을 선택했던 것이다. 2위 지명권을 가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역시 조던을 외면했다. 조던을 선택한 팀은 한 시즌에 30승도 올리지 못하는 그저 그런 팀 시카고 불스였다.


조던은 드래프트에서 쓴맛을 보았지만 낙담하지 않고, 경기마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팀의 성적은 보잘것없었다. 동료들은 그의 신기에 넋을 잃은 채 공 받을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985년 시즌에 다리 골절로 64게임을 결장했다.


조던의 신기가 빛을 발한 것은 1980년 대 후반 스코티 피펜과 B.J. 암스트롱, 그리고 필 잭슨 감독이 시카고 불스에 합류하면서부터였다. 그래도 우승의 길은 여전히 멀었다. 비로소 우승의 기쁨을 맛본 것은 1991년이었다. 플레이오프 지구 결승에서 천적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4 대 0으로 꺾고, 내친 김에 매직 존슨의 LA 레이커스까지 무릎을 꿇리며 NBA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나는 도전 없이 살 수 없다”


1991년 조던의 전성 시대가 열릴 즈음, 시련이 다가왔다. <시카고 트리뷴>의 샘 스미스 기자가 라는 책을 통해 조던이 독선적이고, 거칠고, 자기 도취적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독선으로 가득 찬 채 혀를 쉴새없이 날름거리는 조던의 모습이 실린 표지는 이 책의 의도를 잘 웅변했다. 조던은 허위라고 무시했지만, 의기소침해져 예전보다 더욱 조신하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조던은 피펜과 그랜트의 도움을 받아 불스를 2년 연속 NBA 최정상에 올려놓으며 안정감을 되찾았다. 하지만 조던은 또 한번 차가운 시련과 마주쳤다. 1993년 7월, 아버지 제임스 조던이 고속도로에서 2인조 강도에게 살해된 것이다. 장례를 치르며 삶의 의미를 잃은 것일까. 조던은 그 해 10월 “더 이상 농구에서 달성할 것이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연 코트를 떠났다.


4개월 뒤 그가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선 곳은 뜻밖에도 미국 프로 야구(MLB)였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조던은 애써 그들을 외면하며 연습에 몰두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도전 없이 살아갈 수 없다”라고 말하며 위로받으려 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110km 속도의 볼에 헛스윙을 연발하며 그가 마이너리그에서 1년간 올린 성적은 타율 2할2리, 홈런 3, 타점 51, 도루 30개가 전부였다.


1995년 봄, 그는 또 한번 시련을 딛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농구 코트로 돌아온 그의 수비·돌파력·드리블링은 여전히 현란했다. 슛 동작도 공중에 떠오르면 몇 시간씩 체공할 것처럼 아름답고 완벽했다. 그는 그런 신기로 1996년부터 3년간 또다시 시카고 불스를 NBA 정상에 올려놓았다.


1999년 1월, 조던은 또 한번 농구 코트를 떠났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난해 9월, 단지 농구가 하고 싶어 또다시 코트로 돌아갔다. 예전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던은 뛰어난 기술로 최하위팀 워싱턴 위저즈를 중위권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왔다. 이런 때에 들이닥친 아내의 이혼 소송 제기는 분명 그에게 큰 충격일 것이다.


조던은 1999년 1월13일 두 번째 은퇴식에서 “사람들은 내가 (농구를) 그만두면 도전할 게 없다고 하는데,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알겠지만 부모가 되는 것도 도전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신과 육체 면에서 가장 완벽한 선수로 평가되는 조던이 이번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지 지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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