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우리만의 잔치 아니었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2.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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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색색 ‘외국인 악마들’ 열광적 응원…통역 자원봉사·개최 도시 이미지 홍보 지원도


'짜작작 짜작 대∼한민국, 짜작작 짜작 대∼한민국’. 6월15일 오전 2시, 올림픽공원 평화의문 인근 도로. 한국에서 2년 6개월째 건설 노동자로 일하는 이란인 키잡 주나 씨(40)가 도로에 뛰쳐나와 한국의 월드컵 16강 진출을 축하하며 배재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연호하고 있다. 웃통을 드러낸 채 버스 지붕에 올라 태극기를 흔드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콜리건(코리아와 훌리건의 합성어)이다.


포르투갈전 경기가 있던 6월14일,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청앞 광장에서, 상암동 평화의공원에서, 잠실운동장에서,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우리 국민은 월드컵 16강 진출을 기원하며 모두 하나가 되어 응원했다. 그러나 하나가 된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에 살며 우리와 이런저런 인연을 맺고 있는 외국인 또한 우리와 하나가 되어 한국팀의 승리를 기원했다.


저녁 10시,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옆 평화의공원. 인근 성산동의 인쇄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필리핀인 올리 라바레즈 씨(33)가 동료 에프런 테나(26)·에릭 아단(32) 씨와 함께 이른 저녁을 먹고 나와 한국팀을 응원하고 있다. 어느 나라를 응원하느냐는 물음에 당연히 한국을 응원한다고 답한 이들은 포르투갈 선수가 레드 카드를 받고 퇴장하자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안정환 선수를 제일 좋아한다는 이들은 박지성 선수가 골을 넣는 모습을 보고 히딩크 감독의 ‘어퍼컷 세리머니’를 따라 하며 기뻐했다.



이 날 평화의공원에는 벽안의 붉은악마도 여럿 눈에 띄었다. 캐나다인 데미안 그라이젤 씨(22)는 태극기 문양의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태극기를 온몸에 휘감고 나와 ‘오 필승 코리아’를 힘차게 외쳤다. 어머니가 폴란드 출신이지만 그는 폴란드전에서도 한국팀을 응원했다고 말했다. 역시 캐나다인인 학원강사 드렉 다들리 씨(25)와 마이클 페시아스퍼 씨(26)도 한국팀 유니폼을 입고 나와 ‘홍의 민족’ 대열에 합류했다.


응원하느라 학원 강사들도 휴강


자국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이번 월드컵 기간에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13일 밤 11시30분, 서울시 팔판동의 외국인 전용 게스트하우스. 슬로베니아인 그레가 씨(29)가 방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축구는 인생이다’라고 쓴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그는 친구 사이먼(29)·마르코(28) 씨와 함께 몇 달치 월급을 탈탈 털어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슬로베니아는 3전 전패로 16강에 오르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자기들을 친절하게 대해준 한국을 응원하기로 결정하고 마지막 일정을 포르투갈전이 열리는 인천 문학경기장으로 잡았다.





월드컵이 아닌 다른 이유로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도 월드컵의 열기를 만끽했다. 13일 오후 5시, 연세대학교 국제학사(외국인 전용 기숙사) 휴게실. 중국인 지코 후 씨(24)가 친구 티무 펠토니미 씨(23)와 함께 중국과 터키의 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적이 네덜란드인 그는 중국팀의 승리에 그리 연연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히딩크 감독이 지휘하는 한국팀을 응원했다.


각국 대학생들이 모여 있는 국제학사에서도 월드컵 열기는 뜨거웠다. 자국 경기는 대부분 한두 번씩 관람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기숙사 게시판에는 경기 입장권을 사겠다는 글과 팔겠다는 게시물이 여럿 눈에 띄었다. 지코 씨도 16명으로 구성된 ‘재벌회’ 멤버들과 함께 프랑스와 우루과이 경기를 보기 위해 부산에 다녀왔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붉은악마의 열성이 단연 으뜸이라고 말했다. “한국과 미국 경기 때 강사들이 월드컵을 보느라 전부 휴강했다. 재미 교포 학생들과 경기를 보았는데 그들은 주로 한국을 응원했다. 특히 여학생들은 모두 한국을 응원했는데, 아마 안정환 때문인 것 같다.”


12일 오후 5시, 이태원의 아프리카 식당 캐러비안. ‘검은 악마’들이 모여 나이지리아와 잉글랜드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지리아가 이미 탈락한 탓인지 열기가 덜했다. 식당 주인인 임마뉴엘 씨(31)는 “1차전과 2차전 때는 사람이 미어터질 만큼 많았다. 오늘은 그때의 10분의 1도 오지 않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람들도 나이지리아가 전반전에 고전하는 모습을 보고는 대부분 가버렸다.


비슷한 시각 이태원 거리에서는 이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스웨덴이 아르헨티나와 비겨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스웨덴인들이 몰려 나와 승리를 자축했다. 스웨덴 이동통신 업체의 한국지사에서 일하고 있는 안데르손 하닝손 씨(29·위 가운데 사진)는 친구 크리스티안 베손 씨(31)와 함께 ‘초록 악마’가 되었다. 그는 국기로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바이킹 투구를 쓰고 나와 행인들에게 스웨덴이 16강에 진출했음을 알리며 기쁨을 만끽했다.





외국인 중에는 이번 월드컵 진행에 직접 참여한 이들도 많다. 서울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온 터키인 스멜리 에다 씨(25)는 경기장에서 통역 자원봉사를 했다. 본국에서 온 높은 사람들을 통역한 덕분에 스멜리 씨는 가장 좋은 좌석에서 경기를 보는 행운을 누렸다.


몇년 전부터 이번 월드컵을 준비한 외국인들도 있다. 미국인 모건 윌버 씨(28·82쪽 사진)는 다른 외국인 연구원 두 사람과 함께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월드컵지원연구단에서 지난해 2월부터 도시 마케팅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데모가 잦다는 정도밖에 알려지지 않은 서울시의 이미지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는데, 인터넷에 능한 모건 씨는 외국 유수 사이트의 서울시 관련 자료를 업그레이드하는 일을 맡았다.


16강에 올라간 축구 실력과 함께 한국은 사려 깊은 잔치 주관자로서도 합격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모건 씨는 이번 월드컵이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지금까지 보여준 좋은 모습을 끝까지 지켜갈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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