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마, 욕하지 마, 부활할 거야
  • 이태일 (<중앙일보> 야구 전문기자) ()
  • 승인 2003.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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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 ‘풍운의 야구 인생 20년’/부상·파경 딛고 “다시 던지겠다”
'돈 워리 비 해피(Don’t worry, be happy…).’ 2002년 5월15일 도쿄 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가 1회 초 마운드에 오르는 순간, 장내에는 귀에 익은 팝송이 울려 퍼졌다. 차분한 멜로디에 읊조리는 듯한 보컬, 상기된 선발 투수는 기분을 잔잔하게 가라앉혀 주는 박자에 맞추어 침착하게 승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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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2000년 12월5일 조성민은 다섯 살 연상인 최진실과 결혼했다.



1회 초 순조로운 출발에 이어 1회 말 팀 타선이 4점을 뽑아내 어깨가 가벼워진 그는, 2회 말 공격 때는 안타를 때리기도 했다. 6회까지 순조로운 호투. 요미우리의 12-1 승리로 경기가 끝나자 그는 MEP(Most Exciting Player·최고 수훈 선수)로 선정되었다. 유창한 일본어로 인터뷰에 응한 그는 경기 전보다 더 상기된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거인’으로 태어나 ‘거인’이 되다



무려 1년 9개월 만에 맛보는 뜻깊은 승리였다. 팔꿈치 수술과 거듭되는 재활 훈련, 1군과 2군을 오르내리는 고행 끝에 따낸 감격의 승리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제부터 시작이다. 내가 이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내가 가장 기뻐할 것이고, 아마 펑펑 울 것이다. 돌이 갓 지난 아들이 야구를 알게 될 쯤이면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자신이 있다”라며 기뻐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운명의 신이 그의 행복에 훼방을 놓을 줄이야. 그 날의 승리는 야구 선수 조성민(29)이 일본 무대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거둔 선발승이 되고 말았다. 그는 그 날 이후 딱 한번 더 구원승으로 행운의 승리를 거두었을 뿐 갑자기 찾아온 무릎 부상과 팔꿈치 부상 악화로 자신의 구위를 유지하지 못했고 2군으로 내려갔다. 부상과 회복, 재기와 좌절을 끝없이 계속해온 그에게 당시의 2군행은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결국 그는 5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10월10일 ‘돈 워리 비 해피’가 울려 퍼졌던 그 도쿄돔에서 퇴단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 프로 야구 무대에 작별을 고했다. 7년 동안 그가 남긴 성적은 11승 10패 11세이브. 일본 진출 3년 만인 1998년 전반기에만 7승을 거두며 올스타전에 출전했던 투수라고는 믿기 힘든 단명(短命)이었다.



조성민은 한국에서 야구를 시작한 선수로는 처음으로 일본 프로 야구 최고 명문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었다. 그는 연식정구 국가대표 출신 아버지와 배구 선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운동에 소질을 보였다. 또래보다 한 뼘은 큰 키에다 타고난 순발력으로 멀리 던지고 강하게 때렸다. 서울 용마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해, 은행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둔촌초등학교로 전학해서도 늘 팀의 주축이었다. 야구 명문 신일중·신일고를 거치면서 대형 투수로 성장했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1년, 한국 고교 야구는 혜성처럼 등장한 대형 투수 풍년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박찬호(텍사스 레인저스)·임선동(현대)·정민철(한화)·염종석(롯데)·차명주(두산)·박재홍(현대)…. 한국 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주름잡은 대형 투수들이 그의 동기였다.



이 동기들 가운데에서 조성민은 가장 키가 컸고(194cm), 눈에 띄게 잘 생겼고, 가장 천진한 웃음을 지니고 있었다. 큰 키는 운동 선수로서의 자질과 가능성을 의미했고, 천진한 웃음은 어리광 많고 유혹에 약한 그의 성격을 대변한다.



그가 이끄는 신일고는 차명주의 경남상고, 박찬호의 공주고, 박재홍의 광주일고보다 한 발짝 앞섰다. 그는 1991년 첫 대회였던 대통령배에서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봉황대기와 황금사자기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두 번 모두 최우수 투수가 되었다. 당시 조성민이 단 등번호 ‘1’은 그가 고교 야구 최고 투수임을 상징하는 듯했다.



고려대에 진학하면서 조성민은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곧 회복했고 대학에서도 빛나는 활약을 이어갔다.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95년 겨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계약을 맺었다. 계약금 1억5천만 엔(약 15억원)에 연봉 1천2백만 엔(약 1억2천만원). 당시 국내 프로 야구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거액이었다. 한 단계 높은 일본 프로 야구에의 도전. 그 도전은 ‘야망의 청년’ 조성민을 슈퍼스타로 만들어주는 기회였다.






유혹에 약한 성격, 몸 관리 못해



1996년, 1년을 요미우리 2군에서 보낸 조성민은 1997년 8월5일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상대로 일본 진출 후 첫 승리를 따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8년 시즌 시작과 함께 선발 등판할 기회를 잡았다. 3년 만에 주전 투수로 성장한 그는 전반기에 파죽의 7승을 올렸다. 워낙 페이스가 좋았다. 젊었고, 힘이 넘쳤다. 그 해 6월13일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날.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2-0 완봉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할까, 이 경기 뒤 팔꿈치 부상 신호가 왔다. 무리했던 것이다.



조성민은 한 달 뒤에 치른 올스타전에서 또 한 번 팔꿈치 통증을 경험했고, 이때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도 “그때 만일 다치지 않았더라면 내 야구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부상의 고통은 그를 정상 궤도에서 이탈시켰다. 또 워낙 짧은 기간에 일본 야구의 정상급 스타로 떠올랐기 때문인지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천진난만한 웃음’이 상징하는, 유혹에 약한 그의 성격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2년이 지난 2000년 6월1일, 국내 최고 인기 배우 최진실과 결혼한다고 발표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98년 시즌을 마치고 한국에서 처음 만난 둘은 첫눈에 사랑을 느꼈고 2000년 12월5일 결혼식을 올렸다.
수많은 부상과 끝없이 싸우던 조성민은 결혼한 뒤 1년 6개월 만에 ‘돈 워리, 비 해피’를 틀어놓고 감격의 승리 투수가 되었다. 앞에서 말한 2002년 5월15일의 승리다. 그러나 그 날 이후 그는 더 이상 그 노래를 듣지 못했고, 그 해 10월13일 일본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아내와의 불화로 이혼을 선언해, 또 한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그는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에서 “야구를 다시 하고 싶다”라고 여운을 남겼다. 또 한번 재기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다시 마운드에 오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팔꿈치와 그의 몸 상태, 무엇보다 야구에 대한 그의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없어서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2002년 5월15일 무려 1년9개월이 걸린 그 날의 승리 역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조성민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 날의 승리를 따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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