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는 ‘젊은 피’가 그립다
  • 손장환 (중앙일보 기자) ()
  • 승인 2004.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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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교체만이 살길…박주영·김승용 등 청소년 대표도 발탁해야
11년 전이니까 오래된 이야기다.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1994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이 벌어졌다. ‘도하의 기적’으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경기다. 당시 출전 팀은 한국을 비롯해 일본·북한·사우디아라비아·이란·이라크 6개국이었다.

한국 대표팀 감독은 김 호. 3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김 호 감독이 신경을 썼던 선수는 독일 분데스리가 보쿰에서 뛰고 있던 김주성이었다. 김감독은 김주성을 위해 독일에서 최종 해외 전지훈련을 했다. 비도 많이 오고 기온이 쌀쌀한 독일은 덥고 건조한 카타르에서 최종 예선을 치러야 하는 대표팀에게 아주 나쁜 전지훈련 장소였다. 그러나 김 호 감독은 오로지 김주성과 손발을 맞추기 위해 그곳에서 2주간 훈련했다.

대표팀이 카타르에 입성한 후 훈련 과정을 지켜보면서 ‘왜 김 호 감독이 그렇게 김주성에 게 집착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분데스리가 선수는 달랐다. 국내에서 뛰던 김주성이 아니었다. 패스할 때 패스하고, 돌파해야 할 때 돌파하고, 슛을 날려야 할 때 슛을 날렸다.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180° 다른 모습이었다. 상대 수비수가 1m 정도만 접근해도 무조건 패스했다. 트레이드마크인 시원한 돌파는커녕 드리블도 없고, 슛도 없었다. 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였다. ‘이상하다’ ‘왜 저러지’ 하는 사이에 한 경기, 두 경기가 지나갔다. 유기흥 코치는 김주성을 빼자고 했지만 김 호 감독은 김주성을 끝까지 믿고 기용했다. 결국 일본에 0-1로 패배한 다음에는 감독과 코치 사이에 불화까지 생겼다. 유코치는 마지막 북한전에도 김감독이 김주성을 기용하려고 하자 “함흥철 단장이 김주성을 빼라고 지시했다”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기어코 김주성을 뺐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김주성은 왜 그 중요한 경기에서 평소와 다른 플레이를 했을까. 그 이면에는 부상에 대한 공포심이 있었다. 아시아권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야생마’ 김주성은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잘 적응하는 듯했으나 크게 다쳐 한참을 쉬어야 했다.

최종 예선이 벌어질 즈음에는 부상에서 회복되어 한창 물이 오를 때였다. 그러나 김주성의 뇌리에는 ‘또 다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상황을 알고 보니 김주성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김주성을 대표팀에 뽑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10년도 넘은 옛날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뛸 생각이 없는 선수는 안 된다. 말을 시냇가에 끌고 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 바로 한국 축구 대표팀의 현주소다.

현재 한국 대표팀은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주역들이 여전히 주축을 이루고 있다. 안정환·이영표·송종국·설기현·박지성·이천수는 물론 30세가 넘은 이운재·유상철·최진철도 베스트 멤버로 뛰고 있다. 은퇴한 선수는 황선홍과 홍명보 정도다. 이들은 월드컵 4강의 영광을 이미 경험한 선수들이다. 이전까지 월드컵 본선에서 1승도 거두지 못한 한국, 목표가 본선 1승과 16강 진출이었던 한국. 그런데 유럽의 강호인 폴란드·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을 차례로 꺾고 4강에 올랐으니 그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선수들은 군대 면제 혜택을 받았고, 거액의 포상금도 받았다. 외국팀에 진출한 선수도 많다.

이들에게 지금 최대의 관심사는 뭘까. 아시안컵 우승도 아니고, 월드컵 본선 진출도 아니다. 월드컵 4강을 맛본 이들에게 월드컵 본선 진출은 ‘잘해야 본전’도 안 된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 등 빅리그에서 뛰고 싶은 것이다. 이들에게 ‘태극 마크’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국가를 위해’ 뛰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그것은 이들의 애국심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상황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 축구 대표팀이 하루빨리 세대 교체를 해야 하는 이유다. 이들이 여전히 한국 최고 선수들이고, 월드컵 후에 바로 아시안컵 예선과 본선이 열렸고 월드컵 예선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세대 교체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바꾸어야 한다. 아시안컵과 독일 월드컵 예선에서 보여준 한국 대표팀의 모습은 ‘무기력’이었다.
“독일 월드컵 아시아 예선 통과 쉽지 않다”

2년 전 월드컵 때와 비교해 보자. 우선 압박 축구가 사라졌다. 상대 선수가 볼을 잡으면 2명, 3명이 에워싸고 압박하는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월드컵 2차 예선 레바논전에서 한국은 오히려 미드필드에서 레바논의 압박에 허둥댔다.

최전방과 수비진의 간격도 넓어졌다. 콤팩트 축구는 세계 축구의 흐름이다. 한국은 월드컵에서 이 흐름을 잘 따라 갔다. 그러나 지금은 최전방과 후방의 간격이 30m를 넘지 않으면서 밀물과 썰물처럼 드나들던 모습이 아니다. 공격할 때도 수비진은 한참 뒤에 처져 있다.

히딩크 감독이 강조했던 멀티 플레이어의 역할을 하는 선수도 보이지 않는다. 스피드도 떨어졌다. 목표가 사라진 선수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제 새로 시작해야 한다. 한국의 월드컵 4강은 말 그대로 ‘신화’일 뿐이다. 솔직히 4강 실력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사실을 잊어버려야 할 때다. 4강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가는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 벌써 주위에서는 한국이 아시아 최종 예선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도 들린다.

그럼 누구로 바꾸어야 하나. 뛰고 싶은 선수를 기용해야 한다. 올림픽 대표팀은 물론 청소년 대표팀도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나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이천수와 박지성은 만 21세였다. 그렇다면 아시아청소년선수권에서 최우수선수와 득점왕에 오른 박주영이나 김승용도 충분히 태극 마크를 달 자격이 있다. 김영광·최성국·김동진 등 올림픽 팀에서 주축을 이루었던 선수들 역시 국가 대표가 되어야 한다.

현재 대표팀을 완전히 물갈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파를 쓰더라도 분위기를 바꾼 다음 다시 불러들여야 한다.

지금 한국 축구가 안고 있는 문제는 과도기에서 나타나는 문제다. 즉, 한국 축구는 아직 완성된 축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브라질 선수들이 월드컵에서 우승했다고 목표 의식이 없어지고 느슨해지는가. 한국은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 못한 대사건을 경험한 것이다.

‘속도’와 ‘압박’이라는 흐름을 놓친다면 한국 축구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한·일 월드컵을 통해 세계 최고 축구를 경험했고, 공부했다. 이제 몰라서 못하는 것은 없다. 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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