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실한 번역 통해 ‘혜초의 길’ 되살려
  • 강철주 (<시사저널> 편집위원) ()
  • 승인 2004.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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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정수일 역주/학고재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가 올 4월 펴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학고재)은 ‘세계적 여행기로 꼽히는 우리의 고전’을 ‘우리’가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만든 사실상의 첫 성과라고 할 만하다. 그동안 국내외에서 여러 번역본이 출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왕오천축국전>에 대해 우리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원문 자체가 워낙 소략하고 까다로워(현전하는 <왕오천축국전>은 원래 세 권짜리를 축약한 것인 데다가 결락자도 제법 많다) 접근하기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겨우 6천여 자에 불과한 원문을 역주하고 해설하는 데 5백 쪽이 넘는 정교하고 방대한 노력을 쏟아부었다는 것이다. 기왕의 번역본·주석본에 순순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그만큼 많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원문에 대한 이해를 바로잡아 놓기 위해 역자는 혜초가 여행한 곳의 역사와 지리, 사회와 문화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했다. 한자로 표기된 고대 지명들이 요즘의 어디와 비정되는가도 일일이 밝혔고, 원문 해석의 문법적 오류나 이견을 지적하는가 하면, 결락된 글자가 무엇일 것이라는 추정도 빼놓지 않았다.

단순한 축자 번역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혜초의 진실’을 밝히는 이같은 역주 과정에서 저자가 특히 주목한 점은, 실제로 혜초가 여행한 곳들이 어디어디냐는 점이다. 각각의 여행지들에 관한 혜초의 기술을 면밀하게 분석해 그것이 ‘견문’인지 ‘전문’인지를 꼭 가리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혜초의 여행길 서쪽 끝이 어느 곳인가를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 비로소 동서 문명 교류사에서 차지하는 혜초의 위상을 온전하게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자는, 혜초가 천축국(인도)을 거쳐 727년께 페르시아와 대식(大食:아랍)까지 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보는데, 이는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대군과 격전을 벌인 때(751년)보다 약 25년 앞서 있은 일이다.

한때 국보법 위반 혐의로 복역한 ‘깐수’였던 역자는 머리말에서 ‘한권의 원전 번역이 수백편의 논문보다 학술적 가치가 높으며, 그 수준은 역자의 학문적 자질과 직결한다’고 썼다. 한문·영어·아랍어(세 언어 원전을 모두 번역한 바 있다) 등 외국어에 두루 밝고, 문명 교류사 연구 분야에 정통한 그만이 이런 정도의 역주본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자의 자부심은 정당하다. 일반 독자들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축약본을 기대해본다.

추천인:김풍기(강원대 교수·국어교육학) 이동철(용인대 교수·중국학) 조형준(<세계의 문학> 편집위원) 탁석산(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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