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천재는 영원한 천재다
  • 김영근 (<축구아이> 편집국장) ()
  • 승인 2004.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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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킹 이동국 선수의 ‘인생 역전’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최고 스타로 떠오른 이동국(25·광주 상무)은 막상 조국에서 열린 2002 월드컵에서는 구경꾼 신세로 전락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동국은 오뚜기처럼 일어섰다. 지난 12월19일 독일전에서 보여준 그림 같은 터닝슛은 그의 존재를 확인하게 하는 골이었다. 과거에 그를 청산 대상으로 꼽았던 일부 전문가들조차도 이제 대표팀 공격수 한 자리를 이동국에게 내주는 데 이견이 없다.

이동국은 잘 뛰지 않아 ‘게으른 천재가 말뚝 축구를 한다’는 비난에 항상 시달렸다. ‘골대가 움직여야지, 어떻게 이동국이 움직일 수 있겠어’라는 빈정거림까지 들어야 했다. 그러나 최근 이동국은 역대 스트라이커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활동량을 보여준다. 수직과 수평의 공간 이동과 활동 폭이 넓다. 득점 가능 지역에서의 플레이 패턴이 다소 원만하다는 약점이 있지만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축구·육상 코치, 소년 이동국 놓고 심야 결투

포철공고에서 이동국을 스트라이커로 키운 김경호씨(포항 스틸러스 코치)는 이동국이 최근 패싱 능력이 예리해졌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지한? 상무의 이강조 감독도 “이동국에게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는 ‘움직임이 적다’는 지적은 경기마다 편차가 심한 데서 오는 착시 현상일 뿐 정말로 움직임이 적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동국은 포항동초등학교 4학년 말까지 200m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경북 육상계가 큰 기대를 걸었던 꿈나무였다. 육상 200m에서 이동국은 경상북도 신기록을 작성할 정도로 소질을 보였다. 그런 이동국을 당시 포항동초등학교 축구 감독이던 이영환씨(현 포항 유소년팀 감독)가 육상부 감독과 심야 결투를 벌이면서까지 가로채왔다.

이동국은 축구 유니폼으로 갈아입자마자 축구에서도 천부적인 소질을 뽐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득점왕으로 이름을 날렸다. 고등학교 때 이미 대표팀 스트라이커 계보에 오를 정도로 가공할 골 결정력을 보여주었다.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고졸 최고 대우로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한 이동국은 19세 때 태극마크를 달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다. 여기서 히딩크 감독과 숙명적으로 만났다. 이동국은 희한하게도 월드컵에 출전했거나, 출전 기회를 박탈당하는 결정적인 때에 히딩크 감독과 관계를 맺었다. 히딩크와의 관계는 악연이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정도로 여간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1998년 6월20일 마르세유 벨로드룸 스타디움. 한국은 네덜란드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를 펼쳤다. 후반 33분, 서정원이 발에 쥐가 나 그라운드에 뒹굴자 김평석 감독 대행은 이동국으로 지체없이 교체했다. 당시 차범근 감독은 중도에 해임되었다. 0-4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김감독은 이동국의 등을 떠밀며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동국은 스트라이커 최용수의 약간 뒤에 처져 경기를 했? 후반 42분, 이동국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최용수에게 득점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한국 선수로서는 유일하게 날카로운 슈팅을 날리기도 했다. 이것이 이동국과 히딩크의 첫 만남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 이동국은 이를 악물고 훈련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이동국의 플레이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았다. 히딩크의 싸늘한 시선은 바뀌지 않았다. 이동국은 실력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엉뚱하고 어처구니없는 소문 때문에 탈락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대다수는 엉뚱하게 꾸며지거나 상당 부분 부풀려진 측면이 있었다.

이동국 죽인 어처구니없는 소문들

이동국은 친구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매일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 다닌다는 소문이 꼬리를 이었다. 언제인가 서울 청담동 포장마차에서 고종수 선수가 만취 상태에서 시비를 벌인 것으로 드러나자 언론의 질책은 이동국에게까지 날아들었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고종수와 함께 연예인과 어울려 다닌다는, 이른바 ‘청담동 그룹’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동국의 불운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정용훈 선수(수원 삼성)가 교통 사고로 사망하면서 마음의 상처는 더욱 깊어갔다. 정선수 상가에 나타난 이동국은 발목을 다쳐 깁스를 한 몸으로 밤을 꼬박 지새우며 괴로워했다. 삼오제까지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상가에서 이동국은 대성통곡을 하며 정용훈의 죽음과 고종수의 좌절을 곱씹고, 다시 축구화를 조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동국은 포항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학원 버스를 운전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해맑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두 번씩이나 히딩크에게 물을 먹으면서 마냥 장밋빛이던 축구 인생도 한때 고비를 맞았다. 하지만 이동국은 군인 정신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당당한 모습으로 다시 섰다. 이동국은 A매치 41경기에서 17골을 기록했는데 그 중에서 10골을 본프레레를 만나 뽑아냈다. ‘본프레레호의 황태자’라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님을 기록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동국은 ‘포항도령’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포항 시민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선수도 없다. 이동국은 포항 시내에서 택시는 무임승차다. 식당 주인도 한사코 밥값을 안 받으려고 한다. 홈 경기에서 만약 이동국을 빼기라도 했다가는 어느 감독이라도 오빠부대로부터 봉변을 각오해야 할 정도다. 2005년 3월 이동국의 군 제대를 앞두고 포항은 벌써부터 부활한 ‘라이언 킹’ 이동국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들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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