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명물 ‘춘자싸롱 멸치국수’
  • 성석제 (소설가) ()
  • 승인 2005.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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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남쪽에서 온다. 또 봄은 어린 것들에게 먼저 온다. 며칠 전 남쪽 마을 서귀포에 다녀왔다. 그곳에 시 카페라는, 요즘 보기 드문 ‘문학살롱’을 연 분이 있어서이다.
제주도에 가는 이유의 반은 국수 때문이라고 하는 L선생이 제주에 내려와 있어서 자연스럽게 서귀포 시내의 유명 국수식당으로 가게 되었다. 일행은 다섯이었는데 나는 비빔국수를 먹었고 세 사람은 멸치국수, 한 사람은 고기국수였다. 멸치국수는 멸치로 국물을 내서 먹지 멸치 자체를 먹지는 않는다. 고기국수는 고기로 국물을 낼 뿐 아니라 그 고기를 함께 먹는다.

 
제주도에서 ‘고기’는 조랑말도 소도 아니고 요즘 인기 있는 갈치나 고등어도 아니고, 돼지다. 초행자가 고기국수를 먹기는 쉽지 않다. 십수 년 전 제주도에 들어와 살고 있는 사람도 몇 년 전부터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빔국수는 여느 지역의 비빔국수와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곁들여서 주는 멸치국수 국물이 괜찮은 편이었다. 국수집을 나와 L선생에게 방금 먹은 국수 맛에 대해 품평을 청하자 그는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렇듯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나는 제주도에서 춘자싸롱 국시 말고는 국시로 안 보네.” ‘춘자싸롱’은 룸살롱이나 17,8세기 프랑스의 문학살롱 같은 게 아니라 식당 이름이다. 아니 식당 이름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 식당에는 간판이 없으니까. 메뉴는 오로지 멸치국수 하나뿐이다.
내가 알기로 음식을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을 ‘싸롱’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하나 더 있다. 서울 양평동에 사는 시인 김정환의 집 앞 대로변에 있는 ‘내외싸롱’이 그곳인데 골뱅이무침과 삶은 계란 안주에 맥주를 한 병에 2천원 미만의 실비로 먹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엄연하게 ‘내외슈퍼’라는 간판이 달려 있다. 내외슈퍼의 주인은 물론 함께 상근하는 ‘내외’다. 그럼 춘자싸롱의 주인은 춘자일까. 같은 이름의 손위 친척이 있는 내게는 민망하게도 그렇다고 한다. 40대 이상에 흔한 봄 춘(春), 아들 자(子)라는 일본식 이름이다.

단골들에 의하면 이 집 여주인은 전화를 걸면 “나 춘잔데” 하고 말을 하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외싸롱이 그렇듯 주인이 이름을 붙인 게 아니라 단골 중 하나가 지어붙인 옥호다. 때로는 ‘춘자국수’로 불리기도 하고 ‘춘자싸롱에 춘자국수 먹으러갈까’ 하는 식으로 구분되어 쓰이기도 하는데 싸롱 주인장이 정작 그런 이름을 알는지 모르겠다. 

춘자싸롱은 제주도 남쪽의 표선면 면사무소 앞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다. 도로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데 지붕이 검은 보온덮개로 덮인 재래식 가옥 앞의 블록집이다. 집 앞에 난데없는 소파가 하나 있으므로 그걸 표식으로 삼으면 된다. 유리문 안으로 들어서면 나무 탁자 양쪽으로 너댓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가 있고 국수를 삶고 헹굴 수 있는 수도시설과 양동이, 큰 대야가 있으며 양은냄비가 가지런히 쌓여 있다. 주문을 하면 즉각 그 냄비에 국수가 1인분씩 담겨 나온다. 국수를 미리 삶아 사리로 해놓고 국물도 미리 준비해서 일정한 온도로 데우고 있다가 손님이 오면 냄비에 담아주는 방식이다. 현재 가격은 2천원, 곱빼기는 3천원이다. 어김없이 곱빼기를 먹는 L선생으로서는 멸치국수 한 그릇 값이 3천원인 셈이다. 지역 경제 사정이라든가 전국적인 물가 수준에 비추어 결코 싸다고 할 수 없다. 중요한 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 맛이다. 그는 바로 그 맛 때문에 가격을 감내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맛일까.

춘자 국수는 일단 국수가닥이 굵다. 서귀포에서 주로 팔리는 국수의 면 자체도 좀 굵지만 춘자 국수는 일반 소면의 1.5배는 되지 싶다. 미리 삶아놓기 때문에 국수가 불어서 그런 것 같다. 국수를 막 삶아냈을 때 가면 비교적 가늘고 쫄깃한 국수를 먹을 수도 있겠지만 L선생은 평소에도 면이 퍼진 것을 좋아하므로 문제는 없다.
시장의 그릇 가게에서 흔히 파는 양은냄비는 특별히 새로울 건 없지만 자연스럽게 닳았다.  따라나오는 깍두기는 조금 시고 국수에는 파와 고춧가루를 듬뿍 뿌려준다. 공간 곳곳에 배어 있는 냄새, 조용조용한 주인의 말씨가 모두 그 국수 맛을 구성한다.

하지만 맛의 핵심은 역시 국물에 있다. 서울의 잔치국수에 비해 국물이 굉장히 진하다. 멸치국수 국물은 남쪽 바닷가, 특히 부산ㆍ경남 쪽이 진한 편인데 L선생 역시 경남 출신이다.

어느 때인가 국수라면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춘자 국수의 국물에 관한 세미나가 열렸다. 장소는 표선면의 모처 농장이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농장에서 공사를 할 때 춘자싸롱에 미리 몇만 원의 선금을 줘놓고 할인을 받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그 국수를 먹었다는 광신자였다. 나는 세미나 초장에 국수의 국물 맛은 간장과 물에 있다는 설을 꺼냈지만 전혀 호응을 얻지 못하고 그 뒤로는 그들끼리의 논쟁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남녘 출신 사나이들이 주축인 세미나는, 국수 하나를 가지고 한다고 하지만, 열정적이고 진지하고 무엇보다 집이 떠나갈 듯 시끄러웠다. 하여간 그렇게 먹고도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는 국물이라면 뭔가 남다른 게 있지 않을까. 그 맛의 비밀을 결국 알아낸 집념의 사나이가 있었다.

춘자씨는 국물 맛의 비밀에 대해, 만의 하나 경쟁자가 될 수도 있는 남정네에게 말하려 하지 않았다. 수십 인분의 국수를 더 먹어주고 현생에서는 국수집을 내지 않겠다는 맹세를 듣고 난 뒤 비로소 춘자씨는 국물에 들어가는 재료를 딱 한 가지 더 말해 주었다고 한다. 그것은 제주도에서만 나는 어떤 물고기 새끼라고 한다. 그러니 제주도 밖에서는 그 맛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제주도에서도 아는 사람만 그 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게 비범성(非凡性)이 아닐까.

오전 아홉 시쯤 표선면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전에 ‘춘자씨 댁’에 들렀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전날 밤부터 그렇게 먹으려고 별렀던 국수였지만 이번 길에는 먹지 못했다.

봄은 슬쩍 맛보았다. 표선면 세화리 앞 연청색 바다, 초병의 이를 악물게 하는 바람으로. 무슨 물고기인지 몰라도 그 물고기 새끼에 봄이 들면 춘자국수도 더 맛있어지겠다.

 
성석제 成碩濟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고 1986년 <문학사상> 시부문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94년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간행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일보문학상, 동서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길에 묻다> 등이, 소설집으로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로 <순정>, <인간의 힘> 등이, 산문집으로 <즐겁게 춤을 추다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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