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포로 10여 명 더 있다”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5.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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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파공작원·귀순 간첩·베 트남 전쟁 첩보요원들 ‘이구동성’

 
국방부는 현재 북한에 있는 베트남전쟁 포로가 2명이라고 밝혔다. 1965년 정찰하다가 실종된 박성열 병장과 1966년 9월9일 외출했다가 행방불명된 안학수 하사이다. 이들은 실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의 대남 방송에 나옴으로써 소재가 확인되었다. 국방부는 이들이 베트남에서 행방불명된 뒤 자진 월북했다고 발표하고 이들 외에 북으로 간 국군 포로나 실종자는 더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 2명 외에도 베트남에서 사라진 또 다른 한국인 포로들이 북한으로 송환되었을 것이라는 의혹 제기는 끊이지 않고 있다.

  이번에 <시사저널>이 최초로 공개한 베트남전쟁 포로와 실종자 관련 정부 문서 내용은 국방부가 공식 발표한 실종자 7명 가운데 북으로 끌려간 실종자가 더 있으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1973년 당시 군사 기밀로 관리한 실종자 인적 사항 및 실종 경위에 관한 국방부 문서에는, 평양방송에 나왔다는 안학수 하사와 박성열 병장에 대해 관계 서류가 중앙정보부로 문서 이관되어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두 사람 외에도 1967년 5월27일 실종된 주월사령부 법무부 소속 정준택 하사에 관한 기록도 역시 중정에 이관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추적 결과 북한에서 베트남전쟁 포로를 여러 사람 보았다는 이들은 드물지 않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중앙정보부가 북한에 침투시킨 특수공작원 조영박씨. 공작명 천보산인 조씨는 1970년 조총련을 거쳐 북한에 위장 귀순한 후 남파 밀봉교육을 받고 중앙정보부로 되돌아와 한 차례 더 월북하는 등 15년간 대남 위장 간첩 활동을 벌여온 사실을 <시사저널>에 처음 털어놓은 바 있다. 그는 “1970년 4월부터 9월까지 평양 교외 초대소에서 남파 밀봉교육을 받는 동안 월남에서 끌려온 한국군 포로 10여명을 만났다. 나를 가르치던 지도원이 ‘월남에서 온 남조선 포로인데 태권도 유단자들이어서 월맹군을 차고 도망가는 일이 빈번해 족쇄를 채운 채 평양까지 호송해왔다’고 말했다”라고 증언했다. 몇달 후 재남파된 조씨는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평양에서 본 베트남전쟁 포로 실상을 보고서로 작성해 올렸다면서 지금도 이 기록이 국정원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래 북한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1970년 께 귀순한 정차량씨도 북한에서 베트남전쟁 포로를 만난 경우이다. 정씨는 1967년 4월부터 ‘의거자 학교’에서 베트콩에게 포로로 잡혀 평양으로 넘겨진 안학수 하사와 1년간 같은 내무반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의거자 학교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한 사람을 대상으로 사상 개조 학습을 벌이던 곳인데, 당시 60명 정도가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씨의 체험담은 국방부가 그동안 안학수 하사가 자진 월북했다고 주장한 대목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안학수 하사는 다리에 난 흉터들을 보여주며 북베트남으로 압송되는 도중에 입은 상처라고 했다.” 정씨에 따르면, 또 다른 박성열 포로는 다른 내무반에서 생활했으며, 장교 한 사람은 평양 초대소에 수용되어 교양을 받고 있었다고 전했다. 

1987년부터 5년간 김일성정치군사대학에서 특수 교육을 받고 남파되었다가 귀순한 안명진씨도 북에서 베트남전쟁 국군 포로 출신 교관으로부터 배웠다고 증언했다. 안씨는 “김일성정치군사대학에는 남한 실정을 교육하는 교관이 60명 정도 있는데, 주로 납치자와 베트남전쟁에서 잡아온 국군 포로 출신이다. 나를 담당한 조씨 성을 가진 교관도 베트남전쟁 포로였는데 고향에 대한 향수가 많은 것 같았다. 남한 실정을 과장해서 미화하기도 했고, 남조선 군대에서 배운 방식대로 잔학하게 우리를 다루고 기합을 줘서 지금도 베트남전쟁 포로 출신 교관을 생각하면 분이 가시지 않는다.” 안씨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자발적으로 월북한 의거자는 절대 남파공작 교관으로 쓰지 않는다고 한다.

 국군 파월 기간에 베트남에서 심리전을 펼쳤던 참전 군인들도 국방부가 주장하는 수보다 훨씬 많은 실종자와 포로가 북한으로 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베트남전쟁은 남북의 대결장이기도 했다. 북한은 월맹의 하노이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당시 주월사령부는 파월 장병들에게 베트남 현지 작전 중 북한 군사고문단을 생포하면 1인당 3천 달러씩 포상금을 주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1969년 베트남에서 백마부대 중위로 근무하면서 정보작전과 협조센터에서 첩보 수집 활동을 했던 김영시씨(무학여고 교사)는 베트남전쟁 당시 현지에서 수집한 수많은 북한 삐라를 지금도 고이 보관하고 있다.

 
삐라 내용은 대개 미군의 총알받이가 되지 말고 무기를 버린 채 베트콩의 품으로 오면 평양으로 무사히 안내한다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재(在) 인도지나 조선인련합’ 명의의 전단에는 ‘청춘의 리상을 꽃피우려거든 해방군 편으로 넘어가라. 해방군은 당신들을 북조선으로 안내해줄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나는 당시 베트콩 시신을 점검해 정보가 될 만한 자료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삐라 가운데는 안학수 하사와 박성열 병장이 평양에서 환영받는 장면 사진을 실은 것도 있었고, 맹호부대 소속 ROTC 최 아무개 소위가 의거 월북했다고 밝힌 것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국방부는 사실 무근이라고 부인했다.” 김교사에 따르면, 당시 베트콩 간부들은 북한에 가서 한글을 배운 뒤 조잡한 한글 전단을 만들어 파월 한국군을 상대로 뿌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장에서 북한 삐라를 보고 넘어간 한국군은 없었고, 전투 중 포로가 되거나 외출했다가 베트콩에 납치되어 북한으로 송환된 실종자가 주류였다.

 베트콩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한 주월사령부 소속 중위 박정환씨는 북한으로 끌려간 포로와 실종자를 방치한 한국 정부를 비판했다. 미국 플로리다 주 서부교민회장으로 있는 박씨는 <시사저널> 편집국을 찾았다. “내가 포로가 된 뒤 탈출을 시도하면서, 돌아가면 환영을 받으려나 바보가 되려나 고민이 많았다. 캄보디아에서 감옥생활 중 재판을 받고 실형을 다 산 뒤 고국에 돌아가면 어떤 대접을 해줄지 자신이 없었다. 미군은 포로가 되어도 조국이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군 포로는 조국에 버림받을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자신감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북한으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1967년 10월 월남에 태권도 교관으로 파견되어 월남군 7사단에서 근무하던 박씨는 1968년 1월 베트콩에 납치된 후 캄보디아 형무소에서 5백2일간 갇혀 있다가 1969년 6월 가까스로 한국에 돌아왔다.

 2001년 자신의 포로 생활을 담은 책 <느시>를 펴낸 박씨는 “최소한 9명 이상의 국군 포로가 북한에 생존해 있다”라고 주장했다. 박씨는 특히 민간인 포로가 북한에 송환된 실상이 아직도 덮여 있다고 개탄한다.  당시 베트남에는 한국 건설회사나 미국 회사에 소속된 기술자와 돈벌이를 위해 상주하던 한국인이 많이 있었다. 그들이 실종된 사실은 아직까지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박씨 자신도 베트콩에 잡혔을 때 김규식이라는 민간인 기술자와 함께 끌려가다가 헤어졌는데 김씨도 북한으로 보내졌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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