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집단이라고 얕보면 큰일 나지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5.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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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느슨한 유사 일진회, 수능 부정 등 깊이 개입

꽃샘 추위가 거세던 지난 3월12일, 네티즌 최재호씨(20·다음 아이디:흰눈여우)는 서울 인사동 거리에 탁자와 현수막을 설치하고 서명운동을 벌였다. 지난해 12월부터 서명운동을 시작한 지 열네 번째다. ‘밀양연합 사건이 던진 과제와 해법’이라는 인터넷 사이트 운영자인 김씨는 해당 성폭행 사건의 졸속 수사를 규탄하고 가해자를 엄정 처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밀양연합 사건이란 밀양지역 고등학생들이 울산 거주 여중생을 1년간 집단으로 성폭행하다가 지난해 12월7일 적발된 사건을 말한다(<시사저널> 2004년 12월 30일자 000호 참조). 혐의자가 40명이 넘어 충격을 주었지만, 3월18일 현재 소년법원에 20명이 송치되고 10명이 기소되었으며 구속자는 단 3명뿐이다. 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최재호씨는 “밀양뿐만이 아니라 학교 전반에 만연한 폭력 문화가 문제다. 요즘 일진회의 변태 성문화가 문제되고 있는데, 일진회와 집단 성폭력은 한 뿌리다”라고 말했다. 사이트 회원 수는 7천명이 넘는데, 시간이 흐른 탓인지 3월12일 서명운동을 진행한 회원은 3명이었다. 김씨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 서명운동을 계속할 계획이다.

밀양연합 사건은 학교 폭력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일진회 외에 ‘유사 일진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성폭행 사건을 주도한 집단은 이른바 밀양연합이라고 불리는 느슨한 일진회(유사 일진회)였다. 유사 일진회란 일진회와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지만 조직 이름·강령·신고식 등이 없는 또래 집단을 말한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신순갑 정책위원장은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일진회보다 유사 일진회가 더 많다. 정형화한 일진회만 신경 쓰다 보면 유사 일진회 문제를 간과하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유사 일진회는 그 조직의 실체를 가려내기가 어렵다. 지난해 12월 초 밀양연합 사건으로 체포된 가해 학생들은 처음부터 “우리는 절대 일진회나 밀양연합 조직원이 아니다”라고 부정했다. 지역 학교장도 일진회·밀양연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경찰·검찰은 수사 과정에서도 일진회 개입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사저널> 현지 취재 결과 각 학교 싸움꾼들의 지역 모임으로서 밀양연합은 존재하고 있었다. 다음카페나 세이클럽 등에 ‘밀양연합‘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홈페이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밀양지역 ㅅ고등학교 한 재학생은 “밀양연합은 학교를 주름잡는 아이들의 친목단체다. 밀양연합이라고 하면 아무나 못 건드린다. 청도연합이나 창원연합하고 비슷하다. 요즘 웬만한 지역에는 다 연합이 있다”라고 말했다.

‘유사 일진회’측은 ‘느슨한 일진회’는 학교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다. 밀양 ㅅ고의 한 교사는 “우리 학교 학생들 사이에는 전혀 폭력이 없다”라고 잘라 말했지만, 인터뷰가 있기 전날 만난 해당 학교 ‘자칭 연합’ 소속 학생은 “오늘도 한 녀석과 싸움을 했다”라며 얼굴에 생긴 상처를 보여주었다. 이 학생은 “밀양에는 연합 소속이 40~100명쯤 되는데 정확히 누가 회원이다 아니다라는 말은 못한다”라고 답했다.
유사 일진회는 평소에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한번 사고를 치면 그 파장이 일진회보다 더 무섭다. 학내 분위기를 몰아 집단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광주 수능 부정 사건이 대표적이다. 수험 도중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정답을 주고받다가 뒤늦게 적발된 학생들은 광주지방검찰청 수사 선상에 오른 경우만 1백51명이 넘었다. 이 중 7명이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 사회봉사 명령 80시간 등을 받았고, 25명은 소년부에 송치되어 보호관찰 등의 명령을 받았다.

광주 지역의 수능 시험 부정을 주도한 세력 역시 유사 일진회로 분류 가능한 학생들이었다. 사건 발생 초기에 제보한 한 학생은 “광주 지역 8개 일진회 연합이 수능 부정을 주도했다”라고 말했다. 이후 과정은 밀양 성폭행 사건의 경우와 비슷해서 경찰과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일진회는 언급되지 않았다. 수사를 맡았던 광주지방검찰청 김용규 검사는 "친한 친구들이기는 하지만 조직 형태가 없어 일진회라고 규정하기는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당국의 이같은 조사 결과에 대해 청소년폭력예방재단 광주지부 이재구 사무국장은 “모든 학교마다 다 있는 일진회가 유독 수능 부정이 있었던 고등학교에만 없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광주 ㅈ고의 한 학생은 “부정 시험을 주도한 친구들은 주로 ㅈ중학교 동창들이었다. 중학교때부터 싸움을 잘했던 짱들이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흩어진 이후에도 계속 모임을 가져왔다”라고 말했다. 피의자들은 축구를 하기 위해 모였을 뿐이라고 검찰 수사 과정에서 진술했다.

 
유사 일진회는 정형화한 일진회와 닮은꼴이다. 쌈짱·얼짱 등 잘 노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선발되었으며, 학교 내 문화를 주도하는 권력 집단이라는 점에서 서로 같다. 이들은 학생회 선거 등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또 주로 중학교 때 맺은 관계가 핵심이며, 고등학교로 진학해 분화하면 지역 별로 결합하는(밀양연합·청도연합 등) 행태도 공통점이다. 하지만 유사 일진회는 일진회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구성원의 범주가 명확치 않다는 점에서 정형화한 일진회와 다르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상담가 이정희씨는 “느슨한 일진회라고 하더라도 일단 관계를 맺으면 벗어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도하는 이벤트에 휩쓸리다 보면 도덕 의식이 엷어져 집단 성폭행·집단 수능 부정처럼 ‘분위기를 타는 범죄’에 빠지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최근 정부는 학교에 퇴임 경찰을 배치하는 학원경찰(스쿨 폴리스) 제도를 확대 시행할 계획이다. 또 경찰은 자진 신고 기간을 정하고 일진회 색출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 일진회보다 유사 일진회가 더 많기 때문에 일진회를 중심으로 한 학교 폭력 대책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서울 문일중학교 김길윤 교사는 “학교 폭력은 일진회라는 특정 조직보다 범사회적인 풍토에 더 영향을 받는다. 일진회라는 간판을 단 조직이 없어져도 학교 폭력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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