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그 때 그 사람들-풍운아 박영효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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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의 시점에서 서세동점의 국제 조류 실상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응할만한 경륜과 역량을 지니고 있었던 조선인을 꼽으라면 단연 1884년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이라는 거사를 일으켰고, 그로부터 10년 뒤 잠시나마 조선 정국의 실권을 잡고 갑오 개혁을 주도했던 박영효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당시, 그는 일본에서 암살자들에게 쫓기며 겨우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의 망명객에 불과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
박영효의 본격적인 등장은 임오군란이 나던 해인 1882년에 이뤄진다. 이 해 가을(정확히는 양력 9월12일, 음력 8월9일) 고종의 명을 받들어 일본을 방문한다. 방문 목적은 같은해 8월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일강화조약'에 따라, 임오군란 당시 일본에 입힌 피해에 대해 조선 국왕을 대신해 일본 정부에 대해 공식 사과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자세한 정황은 그가 남긴 외교 일지 <사화 기략(使和記略) >에 전모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대조선이 개국 491년, 상(上-고종) 즉위 19년, 임오년 7월25일(이하 날짜 표기는 모두 음력)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 직함을 엎드려 받잡고 국서를 받들어 일본을 방문을 방문하게 되다. 삼가 살피건대, 이번 임무는 6월 군변으로 인해 일본이 군사를 움직여 속약을 개정한 뒤, 한편으로는 비준을 교환하고 한편으로는 수신(修信-즉 관계 정상화)을 위해 거행하는 것이다. 이번 임무를 맡게 되면서 밤낮으로 걱정이 앞서 장치 어떻게 능 임무를 감당할지 알지 못하다.

이어서 그는 음력 8월1일, 궁궐에 조예하여 고종에게 하직 인사를 고하고 일본을 향해 출발하는 장면 등을 매우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1세. 그가 이처럼 약관의 나이에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 사절로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철종의 부마이자 정1품의 최고 관리라는 자격을 이용해 직접 일본을 돌아보고 오기 위함이었다. 당시 그를 수행했던 주요 인물로는 김만식(전권부사 겸 수신부사)과 서광범(종사관), 유혁로와 나중에 '한국인 최초 미국 대학 졸업생'으로 기록되는 변 수 등이 있었으며, 김옥균과 민영익은 비공식 사절 자격으로 박영효와 함께 출발했다(민영익은 일본 방문중 박영효와 갈등을 빚어 중도에 미국으로 향함).
1882년 박영효의 일본 방문은 훗날 그의 정치 역정을 결정했다는 데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박영효는 약 4개월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당시 일본 정계의 거물들과 서양 주요국의 일본 주재 외교관들을 두루 만났다.
이토 히로부미와는 둘도 없는 친구요,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정치적 동지였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대표적이다. 그는 당시 외무경이었다. 그는 1894년 청일 전쟁 무렵 조선 공사로 한국에 왔으며, 이 때 갑신정변 실패후 일본에 망명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여 정권을 잡게 한 뒤 이를 배후 조종하려다가 박영효와 반복했다. 그는 또 일부 학자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고 있다.
어쨌든 이 때 박영효는 이노우에와 공식/비공식 접촉을 수차례 가지며, 문명 개화 및 부국강병의 세례를 받는다. 당시 박영효의 나이는 21살. 이노우에는 47살. 두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이노우에측의 일방적인 논리에 꿀리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박영효는 도쿄의 관문인 요코하마로 들어가기 전, 이미 효고현 현령 모리야카 마사즈미(森岡昌純)로부터 개화의 필연성에 대해 한차례 '설교'를 들은 뒤였다. 그의 외교 일지 <사화기략 >의 8월15일(음력)에 그 자세한 정황이 전한다. 관련 대목을 옮겨본다.

15일 맑음. 미각에 부사와 함께 삼강창순(모리야카 마사즈미)의 집으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다과가 파하고서 창순이 말하기를, "저(掩)는 본디 사쓰마(薩州) 사람입니다. 사쯔마 사람은 본래 굳세고 사납다고 말합니다. 백성의 의론이 쇄항(쇄국)을 고집했는데, 저 또한 (그같은) 의론을 주장하는 사람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세상 일이 날로 변하고 정치가 크게 새로워졌습니다. 지난날 흘려보던 서양 사람(본문에는 서인)이 어찌 팔꿈치와 겨드랑이 사이처럼 가까워져 아침저녁으로 함께 지내리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런데 유신(維新-메이지 유신)한 지 장차 20년이 가까워지니, (오늘날에는) 백성의 뜻이 오히려 막히고 정체될까를 두려워합니다. 귀국의 일본에 대한 소요(임오군란) 같은 것도 확실하게 일을 맞춰놓아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원컨대, 귀국은 폐방(일본)의 예를 살펴서 힘서 조리가 있게끔 해야 할 것입니다. 목이 메인다고 먹기를 그만둠은 가하지 않습니다"라 했다. 또 말하기를, "귀국은 현재 경리(經理)가 막혀 있지 않으니 크게 광무를 열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또한 모름지기 좋은 방법을 아직
얻지 못했음을 직시하고 곧 매번 이익을 구하고 손해를 돌이키는 방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라 했다....

박영효는 이를 탁견이라고 생각했으니, '말마다 아름답고, 근거가 반듯반듯해 펼치고 드러냄에 숨김이 없으니 가히 사람을 감동시키는 바가 있음을 알았다'라고 자신의 일지에 적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이같은 개화의 세례는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05년 시점에서는 치밀한 간교와 배신 행위였음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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