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세계 정세-미국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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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시리즈, 오랫동안 쉬었다가 다시 시작합니다. 세월 가는 것이 참 무섭군요. 올해도 벌써 11월, 1905년 을사 늑약의 체결 소식이 알려져 전국이 들끓었던 바로 그 달입니다. 위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이 황성신문에 실린 것이 바로 11월20일이었다는 사실은, 언젠가 한번 적어 올렸지요.
자 그럼, 조선이 이처럼 어수선하던 바로 그 때 바깥 세상의 동정은 어떻했는가. 오늘부터 주변 강대국들을 하나 하나씩 리뷰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그 첫째 순서로, 미국. 이야기는 남북 전쟁이 벌어졌던 18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날 한국인 일반의 기억 속에 남북 전쟁은 링컨이 이끈 노예 해방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만, 사실 남북 전쟁은 1950년의 6/25 동란(국제 용어로는 한국 전쟁이라고 들 합니다만, 저는 우리까리 얘기할 때에는 6/25 동란이 맞다고 봅니다)처럼 내전(civil war)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내전이 오늘날의 미국, 즉 현대 미국의 기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11월2일 미국 대선 때 승자 득표제가 화제가 된 바 있지만, 남북 전쟁 이전까지 미국은 일종의 느슨한 형태의 국가 연합이었습니다. 국가 운영의 기본이 되는 화폐 발행도 저마다 알아서 했고, 세금도 제각각 알아서 거두었던 겁니다. 건국 때부터 강조된 분권화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링컨은 이런 미국을 강력한 권한을 갖는 중앙집권화된 국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먼저 중앙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도록 하고, 주 정부가 연방 정부로부터 탙퇴할 수 있는 권리도 봉쇄해버렸으며, 세율을 올려 주 정부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뜯어내, 이를 철도를 부설하거나 서부를 개쳑하는 데 투자했습니다. 토마스 딜로렌조라는 미국 경제학자가 쓴 바에 따르면, 링컨은 초창기 노예제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그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것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남부 주에 근거를 무너트리기 위한 차원이었던 것입니다.
미국은 남북 전쟁 승리 후 남부에 대해 한동안 강력한 군정을 실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미국의 첫 군정 경험이었습니다. 군정은 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거나 남부 정치인의 정계 복귀를 원천 봉쇄하는 등 가혹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어쨌거나 링컨과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그랜트의 지도 아래, 미국의 공화당은 이후 70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미국을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탈바꿈해 힘을 기르게 되는데, 그 힘이 유럽 강대국에 맞먹을 정도로 커져, 마침내 미 대륙 바깥을 넘보게 되는 시점이 바로 1898년 윌리엄 맥킨리가 대통령으로 집권했을 당시 발발했던 미국-스페인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은 이 전쟁으로 쿠바와 푸에르 토리코를, 그리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는 필리핀과 괌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 때부터 미국은 동아시아, 특히 중국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쪽이 유럽과 멀리 떨어져 있어 유럽의 강대국의 정면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팽창했다고는 하나, 아직은 유럽 각국과 정면으로 맞붙기에는 힘에 부친다고 판단한 미국이, 자기네 이익 추구의 적격지로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비교적 유럽의 힘이 덜 미치는 아시아 태평양을 골랐던 것입니다.
당시 맥킨리 대통령은 미국의 해외 진출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전까지 미국은 1823년 이래 확립되었던 먼로 독트린에 의지해 대외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당시 국제 정치를 주도했던 유럽의 정치판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뒤 미국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해외 시장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먼로 독트린을 지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미국 조야가 논쟁을 벌였는데, 당시 맥킨리가 소속했던 공화당이 조셉 풀리쳐 랜돌프 허스트 등에 공격받자, 맥킨리 대통령은 당의 단합을 위해 전쟁을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멘킨리는 전쟁 기간 중 재선된 대통령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중인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그 유사성이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맨킨리 대통령은 이밖에도 현재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공통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외교사가가 소개한 바에 따르면, 맥킨리가 필리핀 합병을 결정한 것은 순전히 '신의 계시'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즉, 어느날 밤 신이 나타나 '필리핀을 취해 필리핀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기독교의 세계로 이끄는 일을 빼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는 겁니다.
미국 정부의 필리핀 합병은 미국이 자기네가 스스로 설정한 나와비리, 즉 서반구 바깥에서 땅을 얻은 최초의 사건이 됩니다. 그런만큼 필리핀 합병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도 반대 여론이 높았다고 하는데, 그 중 '철강왕'으로 알려진 앤드류 카네기는 대표적입니다. 그는 미국
에 의한 (미 본토 이외에서의)영토 확장이 공화당의 전통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고, 당시 메사츄세츠 주 상원 의원이었던 프리스비 호어와 함께, 필리핀 합병을 막기 위한 강력한 반제국주의 활동을 펼쳤답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1905년 즉, 미국이 일본과 필리핀/조선의 합병을 상호 인정하기까지 미국 안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정말 맥킨리의 말대로 '신의 계시'에 복종하기 위해 필리핀을 먹었을까요. 필리핀 합병이라는 용단이 내려지기까지, 미국은 자신의 처지와 세계 각국의 열강 움직임을 면밀하게 리뷰하며 장차 짧게는 50년, 길게는 100년 이상 유지될 대전략을 수립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번에는 그 큰 그림의 메스터마인드, 알프레드 마한을 만나보겠습니다. 그를 보면, 내일의 동아시아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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