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선과 국보 그리고 친일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3.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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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문화재 정책을 뒷받침했던 대표적인 조선인으로는 육당 최남선과 이능화(1869-1943) 김용진 김대우 등 네 명이 있습니다. 김용진을 제외한 세 명은 반민족문제연구소가 엮은 '친일파 99인'에 이름이 올라 있을 정도로 대표적인 친일파들입니다. '김용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아직 실체 파악이 안되어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인 최남선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육당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1933년에 만들어진 일제의 '조선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회'에서 위원직을 맡으며 일제의 문화재 정책을 합리화하는 데 앞장선 까닭은 무엇일까요.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남선은 18세 때인 1907년 문화사업에 착수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월간잡지 <소년>을 창간해 우리나라 잡지사의 한 장을 열었습니다. 1910년에는 조선광문회를 조직하여 <역사지리연구>를 간행했고, 1914년에는 <청춘>지를 발간하였습니다. 30세 때인 1919년 3 ·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1921년 10월까지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이쯤되면 일제의 눈엣가시가 되었을 법한데 어찌된 일인지 육당은 192년을 넘기면서 서서히 변화된 행보를 합니다. <동명>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유명한 <불함문화론>(1925)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 활약하던 그는 1928년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직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가 1933년 조선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회 위원직을 맡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 보존회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국보의 순서 등을 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문화재와 관련해서도 최남선은 일제의 정책에 적극 들러리를 선 조선인이었습니다.
1949년 2월 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쓴 옥중 자백서인 '자열서'에서 그는 다섯 가지로 자신의 죄과를 들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회 편수위원이 된 일(192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된 일(1938년) △만주 괴뢰국의 건국대학 교수가 된 일(1939년) △일제 말기에 학병 권유 연사로 활동한 일(1943년) △일선동조론을 부르짖은 사실 등이 그것입니다. 당시 최남선은 이런 행위에 대해 "언제나 시종일관하게 민족 정신의 검토, 조국 역사의 건설, 그것 밖으로 벗어난 일이 없다"라는 말로 자신의 친일 행각을 변명했습니다.
2002년 1월 25일 그가 살면서 학병을 권유했던 수유리 고택 '소원(素園)'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서울시 문화재 위원회가 그가 살았던 이곳을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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