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1호 숭례문에 대한 몇가지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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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쓴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니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광해군 2년(1610) 6월 왕세자 책봉을 위해 조선에 건너온 중국 사신 염등은 악명이 높은 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갖은 구실로 뇌물을 요구했는데 심지어는 은으로 된 사다리를 만들어 서울 남대문을 넘어가 칙서를 받들게 하고는 이것을 친교라고 하면서 은을 거두어들이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2. 역시 같은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서울 도심에도 배가 다닐 뻔한 적이 있었다. 태종 13년(1413) 7월20일 태종실록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태종이 경회루 아래에 나아가 의정부에 일렀다. '숭례문에서 용산강까지 운하를 파서 배를 오가게 한다면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모래땅이므로 물이 늘 차지 않을까 의심스럽다. 경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여러 신하들이 찬성했지만 의정부 찬성사 유양이 반대했다. '용산강은 도성에 가까운데 어찌 백성들을 괴롭히겠습니까?' 임금이 일을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3.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숭례문 현판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궁전에 씌어진 액자들은 누구의 글씨인지 전혀 모르는데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 왜적들이 그 액자를 떼어 버려 유실되었는데 왜란이 평정된 후 남문 밖의 연못 근방에서 밤마다 괴이한 빛이 나오므로 그곳을 발굴하니 이 액자가 나왔다.

- [황화집]에는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나라 초기에 걸었던 편액이 반드시 있을 것인데 양녕대군이 어째서 다시 썼단 말인가. 난리가 평정된 후 다시 찾아 걸었다고 하니 정공은 또 어떻게 그를 써서 걸었단 말인가. 정공은 세조 때 사람으로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비석이나 종의 이름을 어명에 의해 많이 썼으니 숭례문 편액이 그의 글씨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글자체를 보아도 그의 서체임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때에 왜노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평정된 후 다시 찾아 걸게됨으로써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와전된 데다 괴이한 광선에 대한 설까지 다시 덧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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